최후의 만찬장
이스라엘 예루살렘의 구시가지에는 예루살렘 성이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신성시하는 통곡의 벽이 있고, 무슬림들이 신성시하는 무함마드의 성지도 있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멀지 않은 곳에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기 직전에 제자들과 함께 식사를 했다는 ‘최후의 만찬’ 장소가 있습니다. 건물이 상당히 근사하고 위치도 예루살렘 성에서 가까워 요지에 속하는 이곳에서 예수님이 어떻게 최후의 만찬을 할 수 있었을까요. 누군가 빌려주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유월절 식사를 할 곳을 찾는다는 말을 듣고, 하인을 부릴 만큼 재력이 있는 유대인이 자신의 집을 빌려준 겁니다. 그런데 재력이 상당히 괜찮았을 그 유대인은 왜 예수와 제자 일행에게 집을 빌려주었을까요? 추측해보면, 아마도 그 유대인은 예수님에게 호감을 갖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집을 빌려주진 않았을 테니까요.
길을 가다가 공터에서 설교하고 있는 예수님을 봤을 수도 있고, 간음한 여자를 공격하는 사람들에게 “죄 없는 이가 돌을 던지라”고 말하는 장면을 봤을 수도 있고, 시장에서 예수께서 사람들에게 하는 이야기를 듣고 감동을 받았을 수도 있습니다. 아니, 어쩌면 직접 예수를 찾아가 자신의 문제를 털어놓고 해결법을 찾았을 수도 있습니다.
혹자는 예수님은 헐벗고, 병들고, 가난하고, 약한 사람들을 위해서만 일을 했다고 합니다. 다시 말해 사회적 약자를 위해서만 하늘의 메시지를 전했다고 주장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사회적 약자의 구세주로 보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사회적 약자를 더 불쌍히 여기셨음이 틀림없지만 그들만을 위한 구세주는 아닙니다. 왜냐하면 성경에는 이렇게 기록돼 있습니다. “하나님은 악인이든 선인이든 똑같이 해를 비추신다.” 이것은 예수께서 직접 하신 말씀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은 악인이든 선인이든, 가난한 사람이든 부자이든, 사회적 약자이든 권력자이든 가리지 않고 하늘의 메시지를 전하셨습니다. 왜냐하면 그 모든 사람이 결국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유한한 존재인 인간의 삶에는 필연적으로 희로애락이 있습니다. 누구도 이걸 비켜갈 수는 없습니다. 제아무리 최고의 권력자, 최고의 갑부라 해도 희로애락의 파도 앞에서 인간은 휘청거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삶의 파도 앞에서 휘청거리는 사람들. 설령 그들이 유대의 제사장이거나 최고의 권력자, 아니면 예루살렘 최고의 갑부라 해도 말입니다. 예수님께는 그저 ‘문제를 가진 인간’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