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상수훈의 위로

by 동부중앙교회 posted Aug 14,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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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상수훈의 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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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대부분 에고를 중심으로 보고, 듣고, 판단하며 살아갑니다. 그렇게 나 중심으로 살아갑니다. 그게 나의 마음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나의 마음하나님 나라의 마음으로 바꾸어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하나하나 조목조목 지적하며 하나님 나라의 마음을 우리에게 설명해줍니다. 왜냐하면 나의 마음이 하나님 나라의 마음을 닮아갈 때, 비로소 우리는 하나님 나라를 살게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산상수훈에서 행복하여라, 슬퍼하는 사람들!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슬퍼하는 사람들. 어떤 슬픔인가. “마태복음에선 펜툰테스(Penthoun-tes)’라고 썼습니다. 이건 상실의 슬픔을 뜻합니다. 사별 등 매우 소중한 걸 잃은 극심한 슬픔입니다. 누가복음에선 클라이온테스(Klaiontes)’란 말을 썼습니다. 땅을 치면서 우는 걸 뜻합니다.

 

   “히브리어로는 사파드(Sapad)’입니다. 애통해하면서 우는 걸 뜻합니다. 슬픔은 감정이고, 우는 건 표출인데 사파드에는 이 두 의미가 통합돼 있습니다.”

 

   그런데 이상합니다. 슬퍼하는 사람이 왜 행복할까요? 사람들은 불난 집에 부채질하느냐?’고 반문할 것입니다. 도대체 슬퍼하는 사람이 왜 행복할까요? 그 답이 위로에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헛되이 부르지 않으려 했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기록할 때 수동태를 많이 썼습니다. ‘하나님이란 주어를 생략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위 구절의 위로하나님이 주시는 위로가 됩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슬픔은 비와 같다. 장미꽃을 피울 수도 있고, 진흙탕을 만들 수도 있다.’ 결국 슬픔도 선택의 문제입니다. ‘헤리 로더라는 가수가 있었습니다. 그는 공연 중에 아들의 전사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런데도 평소처럼 노래하며 공연을 마쳤습니다. 그리고 야전병원으로 달려갔습니다. 그는 아들의 시신을 붙들고 우는 대신, 그곳에 있던 군인들을 위해 노래를 불렀습니다. 훗날 잡지사 인터뷰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들의 죽음이 너무도 슬펐다. 그러나 하나님께 제 슬픔을 맡겼다. 그러자 놀라운 위로와 힘을 받았다. 나는 그걸 보여줬을 뿐이다.”

 

 

 

 

 

 

 

 

   그걸 가슴 깊이 받아들이면 희망이 생겨납니다. 슬픔의 끝에 위로가 있습니다! 그 고통의 끝에 무엇이 있는 줄 아니까. 슬픔이 와도 두렵지만은 않게 됩니다, 고통이 와도. 그걸 가슴 깊이 받아들이면 희망이 생겨납니다. 슬픔의 크기와 비례하는 위로입니다. 우리가 명심할 건 슬픔의 끝에 위로가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누리는 행복도 싱겁습니다. 슬픔과 절망을 겪지 않은 사람의 삶은 싱겁습니다? “우리의 일상에 극심한 슬픔이 닥칠 때는 어찌해야 하나? “슬픔과 절망을 겪지 않은 사람의 삶은 싱겁습니다. 그래서 누리는 행복도 싱겁습니다. 우리가 명심할 건 슬픔의 끝에 위로가 있다는 겁니다. 슬픔의 크기와 비례하는 위로입니다. 그걸 가슴 깊이 받아들이면 희망이 생겨납니다. 고통이 와도, 슬픔이 와도 두렵지만은 않게 됩니다. 그 고통의 끝에 무엇이 있는 줄 아니까! 슬픔의 끝에 위로가 있습니다. 그걸 가슴 깊이 받아들이면 희망이 생겨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