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변하고 있는가?
최영기 목사님이 아래와 같은 내용의 질문을 하셨습니다. 저와 여러분 모두 이 질문에 고민해야 합니다. “가상 질문을 하나 던지겠습니다. 여러분들이 새로운 집으로 이사 갔다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주택 마당 한 가운데 큰 돌이 있습니다. 이 돌을 치워 보려고 팔로 밀고, 다리로 밀고, 등으로 밀고, 한 시간 동안 별 짓을 다 해 보았습니다. 그러나 돌은 꼼짝도 하지 않았습니다. 이 사람은 일을 했습니까, 안 했습니까?
물리 공식에 의하면 이 사람은 일을 하지 않았습니다. W=F x d, 즉 일(Work)은 힘(Force) 곱하기 거리(distance)이기 때문입니다. 힘(F)을 아무리 썼어도 돌의 위치에 변화가 없으면 거리(d)가 0이 되고, 힘(F)과 거리(d)를 곱한 일( W)은 0이 됩니다. 일을 안 한 것입니다.
이러한 물리 공식은 설교에도 적용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많은 시간을 써서 설교 준비를 하고, 열정적으로 설교를 했다 할지라도, 청중들에게 변화가 없다면 설교를 하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또 설교를 통해 아무리 많은 은혜를 경험했다 할지라도 내 삶에 실질적적인 변화가 없었다면 나는 설교를 듣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가정교회 3축인 목장 모임, 삶 공부, 주일 연합 예배는, 각각 인간의 지(삶 공부), 정(목장 모임), 의(주일 연합 예배)를 터치해 줍니다. 연합 주일 예배의 목표가 의지적인 면을 터치해 주는 것이라면, 담임목사는 주일 설교를 통하여 성도들이 결신하고 헌신하도록 해야 하고 성도들은 설교를 통해 결신과 헌신이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결신과 헌신은 변화를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설교를 통해서 성도들에게 변화가 없다면 그 설교는 하지 않은 것이고 듣지 않은 것과 다름없습니다.
그런데 수많은 설교에도 불구하고 교인들의 삶에서 왜 변화를 볼 수 없을까요? 이는, 교인들에게 어떤 변화가 일어나기를 원하는지 분명한 목표 없이 설교자가 강단에 서기 때문이고 성도들도 말씀을 통해 자신의 어떤 부분에 변화가 일어나기를 소원하는지 기대와 목표가 불분명하기 때문입니다.
교육학에서 변화의 영역을 크게 4개로 분류합니다. 지식(knowledge), 이해(understanding),태도(attitude), 기술(skill)입니다. 새로운 지식을 습득하든지, 새로운 이해를 갖게 되든지, 새로운 태도를 결심하게 되든지, 새로운 기술을 체득하도록 하는 것이 교육의 목표입니다. “설교가 좋았다”,“설교에 은혜 받았다”라는 말에 설교자들은 속지 말아야 하고 청중들도 설교의 감동에 속지 말아야 합니다. 변화가 중요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