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정녕 기쁨으로 그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시 126:5-6).
농부가 울며 씨를 뿌린다는 것에는 크게 두 가지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첫째는 가난 때문입니다. 과거에 우리도 보릿고개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가을걷이가 끝난 농부는 그렇게 오래 추수의 기쁨을 누릴 수가 없었습니다. 일 년간 농사짓느라 빌린 빚을 갚을 쌀과, 내년에 다시 심을 종자, 그리고 땅주인에게 내 놓아야 하는 쌀을 구별하면, 추수 때 까지는 커녕 겨울이 지나 다시 씨앗을 뿌리는 봄이 되기도 전에 양식이 떨지 곤 했습니다. 그러면 유일한 희망이 보리타작이었습니다. 그때까지는 수 없이 굶거나 겨우 풀죽을 끓여 먹거나 심지어 소나무 껍질을 벗겨 먹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먹지를 못해 얼굴이 퉁퉁 부은 아이들을 보면 부모는 씨를 뿌릴 종자고 뭐고 당장 타작을 해서 아이에게 먹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습니다. 하지만 농부는 울며 씨를 뿌립니다. 그래야 미래가 있고 추수의 기쁨이 있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농부의 마음처럼 하나님을 향한 성도의 마음입니다. 힘들고 어려웠던 시절, 얼마 안 되는 헌금이지만 그것조차 시험이 되었고 유혹이 될 때가 있습니다. 물론 지금도 힘들고 어려운 환경 속에 사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굶고 있는 아이들을 생각하면 라면이라도 한 봉지 사서 먹이고 싶습니다. 하지만 어찌 하나님께 드릴 십일조며, 감사헌금을 당장의 굶주림을 면하기 위해 사용할 수 있겠습니다. 그래서 울며 헌금하던 옛 믿음의 선배들이 있었습니다. 극한 가난 속에서도 하나님께 만은 최고를 드리고 가장 귀한 것을 골라 드렸습니다.
하지만 요즘은 자기 집에서도 안 쓸 물건을 교회로 가져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신은 좋은 물건을 쓰면서 교회가 필요한 물건은 중고로 사용하자고 떼를 쓰다시피 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성미 함에 벌레 난 쌀을 드려서 여름 내내 벌레 때문에 고생했는데 급기야 지난 주 성미 함에는 썩은 쌀이 들어 있었습니다. 성미는 담임목사의 양식을 위해 거룩히 구별하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일부러 썩은 쌀을 드렸겠습니까! 만은 어쨌든 불경건의 도가 넘은 것 같습니다. 그 마음속에 하나님을 향한 경건과 두려움이 없는 것만은 틀림없습니다. 그러면 안 됩니다. 울며 씨를 뿌리는 농부의 마음처럼 하나님과 교회를 섬기십시오. 그래야 복을 받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