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새해는 우리 모두가 한 단계 더 성숙해 졌으면 좋겠습니다. 주님은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 5:48) 하셨습니다. 하지만 “온전 하라”는 의미에 대해 오해가 있는 것 같습니다. 이를 어떤 분이 “불명확성을 수용하는 능력(the ability to live with ambiguity)” 으로 정의했습니다. 최영기 목사님의 글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우리는 젊을 때에는 모든 것을 흑백 논리에 의하여 구분을 합니다. 옳든지 그르든지, 잘 하든지 못하든지, 둘 중의 하나입니다. 그러나 나이가 들어 인생 경륜이 쌓이면서 인생이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선한 사람에게 악한 면이 있고, 악한 사람에게 선한 면이 있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바른 의견에도 틀린 점이 있고, 틀린 의견에도 바른 면이 있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사도 바울은 섣부르게 남을 비판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첫째 이유는 동기를 충분히 알지 못하기 때문이요 (고전 4:5) 둘째 이유는 징벌할 분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롬 14:10). 이러한 명령을 실천에 옮길 수 있기 위해서는 성숙해야 되고, 거꾸로 이러한 명령에 순종함으로 우리는 성숙지기도 합니다.
남을 수용하지 못하는 미성숙한 사람을 완전주의자라고 합니다. 이런 사람은 남의 불완전뿐만이 아니라 자신의 불완전도 수용하지를 못합니다. 그래서 항상 불평과 긴장 가운데 삽니다. 미성숙한 완전주의자는 범죄자가 될 수 있습니다. 좋은 예가 2차 대전을 일으킨 히틀러입니다. 그는 지구위에 완전한 사회를 이루기를 원했습니다. 그는 게르만 종족이 지상에서 가장 우수한 종족이라고 믿었고, 게르만 족이 지배 종족이 되어야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북구 백인들 간의 결혼을 장려했습니다. 동시에 열등한 종족을 제거해야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유대인들을 열등한 종족으로 치부하고 집단 학살을 하였습니다.
하지만 완전을 추구하는 것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주님의 완전한 모습을 닮도록 끊임없이 노력해야합니다. 또 주님의 사역에도 완전을 추구하며 일해야 합니다. 인생에 있어서도 사도 바울처럼 ‘선한 싸움을 다 싸웠다’(딤후 4:7-8) 말할 수 있을 정도로 흠 없이 살려고 애써야합니다. 약속은 지켜야 하고, 시간도 그렇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아무리 노력한다 하더라도 자신도, 이웃도, 완전해 질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해야합니다. 그래서 자신과 이웃에게 관대해야합니다. 이것이 진정한 성숙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