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상에서 가장 넓은 강은? - 미시시피? 한강. 라일강? 아닙니다. “만약에 ∼ 할 수 있다면”이라는 강입니다. 마치 강가에 서서 저 건너편 강을 바라보면서 내가 배가 있다면? 하는 것처럼, 우리는 수많은 문제 앞에서 날씬하다면, 부유해질 수 있다면, 결혼만 한다면, 아만 있다면, 집을 살 수 있다면? 등등 그러면서 “만약에 ∼ 할 수 있다면” 라는 강을 건너려고 하지만 못할까봐 걱정이 태산입니다. 그래서 더 오래 일하려고 합니다. 더 많은 책임을 지고, 잠을 줄이고, 스트레스를 듬뿍 받고, 그래서 사실은 더 좋은 일이 일어 날 것 같은 “만약에 ∼ 할 수 있다면” 강 건너 펀으로 가기위해 더 많은 뱃삯을 지불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많은 뱃삯을 지불하고 강 건너 편으로 건너가서 과연 행복해 졌는가? 그렇지 않은 경우가 훨씬 많습니다. 행복이라는 강 건너 편으로 가기위해 지불한 뱃삯을 위해 또다시 염려와 싸워야 하고, 빚을 갚아야 하고, 몸이 망가지고, 또 다른 스트레스가 나를 짓누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상황이 변할 때 우리가 행복한 것이 아니라 우리의 태도가 변할 때 행복해 진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즉 “만약에 ∼ 할 수 있다면”라는 강을 건너려고 애쓰지 말고, “6.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7.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라고 말합니다.
- 태도의 변화에 있어 가장 중요한 변화는 “감사”입니다. 감사할만한 조건이나 환경이라면 당연히 감사하겠죠! 하지만 힘들고 고통스럽고, 어려운 문제 봉착했다 할지라도 감사할 수 있다면? 그러면 두려움과 염려라는 내 마음의 병이 질식해서 스스로 사망할 것이라는 뜻입니다. 감사는 자존감을 높이고, 수면의 질을 높이고, 인간관계가 좋아지고(감사하는 사람을 주가 안 좋아 하랴!) 그래서 두려움과 염려를 치료할 뿐 아니라 인생의 비옥한 평야로 나를 인도합니다. 기도도 달라집니다.
바울은 11-12에서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바울은 감사를 ”비결“이라고 표현했습니다. 맞습니다. 감사는 모든 걱정과 두려움과 염려를 질식시키는 비결입니다.
* 주님은 요 14:27에서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하셨습니다. 참된 평안은 인간이 노력하고 애써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위로부터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힘들고 어렵고 두려울 때, 우리의 할 일은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하는 일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은 위로부터 주시는 평안을 선물로 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매주 묵상하고 있는 사도행전의 말씀 중,지중해에서 바울이 탄 알렉산드리아 배가 지중해에서 만난 유라굴로라는 광풍을 만나 어떻게 하나님의 역사와 경륜을 경험하고 있는지에 대해 나누고 있습니다. 그리고 빌립보서의 말씀은 이 경험이 토대가 되어 로마감옥에서 빌립보 성도들에게 주신 편지입니다. 그러니까 바울은 그냥 설교자로서 목회자로서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죽음과 다름없는 최악의 상황에서 자신은 무엇을 했으며, 하나님은 어떻게 역사하시고 일하셨는지 간증이 들어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극한 상황에서 인간이 할 일과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 다름을 말하고 있습니다. 극한 상황과 두려움 속에서 인간이 할 일은 결코 상황과 싸우거나 해결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하나님의 자녀임과 하나님께서 나의 아버지 되심을 믿고, 찬양과 감사, 그리고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와 간구를(겸손히 요청드림) 하는 것이며, 그때 하나님은 모든 상황을 감사의 조건으로 바꾸시고, 위로부터 내리시는 평안을 우리에게 더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힘들고 어려운 일을 만나면 자꾸 우리의 경험과 지식을 동원합니다.믿음은 사라지고, 환경을 바라봅니다. 알렉산드리아 배에서 백부장 율리오는 바울의 말대신 선장과 선원들의 말을 우선했습니다, 바울은 설교가이고, 선장과 선원들은 전문가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바울은 이들 선원들보다 더 많은 바다를 경험했습니다. 부엇보다 기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결국 바울의 말을 듣지 않고, 그레데 섬의 미항을 떠나 뵈닉스항으로 이동하려했습니다. 눈에 보기에 미항은 불편하고 좁았습니다. 미항에서 뵈닉스 항은 50km쯤으로 몇 시간 정도면 갈 수 있는 거리이니 행여 무슨 일이 생겨도 충분히 극복하리라 자신했습니다. 우리 교회 성도들도 종종 그러합니다. 경고하지만 안 듣습니다. 모세의 누나 미리암처럼 너만 기도하냐, 너만 말씀보냐! 이런 태도로 겉으로는 순종하는 척 하지만 이미 마음에 결정을 내렸습니다. 그러다가 유라굴로를 만났습니다. 후에 바울은 행 27장 21절에서 “내말을 듣고 그레데에서 떠나지 아니하여 이 타격과 손상을 면하였더라면 좋을 뻔하였느니라” 불순종으로 인해 굳이 겪지 않아도 될 일을 겪었다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