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 90년대 들어서며, 갑자기 영화관이 사양 길로 : 벨기에의 한 극장 극장주가 그 이유를 연구한 결과 30대, 40대가 거의 영화관을 찾지 않게 됨. 왜냐하면 대부분 이 시기에 결혼하고, 아이가 생기면서 가고 싶어도 여건이 안 됨, 주차의 어려움, 아이를 맡겨야 하고, 식사, TV나 소위 OTT라고 하는 인터넷영화나 드라마가 활성화. 그래서 복합상영관이라는 것을 개발. 영화, 식사, 아이들 놀이나 위탁소, 주차의 편리성, 상영관 의자를 넓히고 편하게 감상할 수 있도록 / 기업은 고객을 왕이라고 하지 않는가! 고객이 원하는 대로 바꾸지 않으면 쇠락의 길을 갑니다.
- 그러면 성도에게 왕은 누구인가요. 예수님입니다. 우리의 왕으로, 인생의 주인으로 섬기기로 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끊임없이 왕 되신 주님의 요구에 부응하고, 자기혁신을 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은 마가복음 10장의 청년의 질문과 비슷합니다.“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겠습니까?” 하지만 의도가 하늘과 땅 차이만큼 다릅니다. 부자 청년은 정말 영적인 목마름 때문이지만 율법사의 질문은 의도가 불순합니다. 답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주님을 올무에 떨어뜨리기 위함입니다. 예를 들면 과거 소련의 KGB가 숙청대상자들의 글을 입수해서 그 글을 빌미로 제거했습니다. 간단합니다. 작사가가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라는 가사를 쓰면, 잡아다가 심한 고문을 하고, 네가 사랑한다는 대상이 누구냐? 미국이지? 이런 식입니다.
이런 율법사의 사악함을 모를 리 없는 예수께서“율법은 뭐라고 했으며, 너는 그것을 어떻게 이해했느냐?” 그러자 율법사는 자신 있게 신 6:5, 레 19:18을 인용해서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네 뜻을 다하여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였고, 또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였습니다.” 역시 율법사답게 아주 흠잡을 데가 없는 모범 답을 내놨습니다. 그리고 다시 예수님의 답을 기다립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오히려 율법사를 당황하게 하는 답을 주셨습니다. “네 대답이 옳도다. 그대로 행하여라. 그러면 살 것이다.” 예수님은 믿음은 지식이 아니라 행하는 것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하지만 율법사는 물러서지 않고 다시 질문합니다. “이웃이 누구입니까?”이것에 대한 답변이 그 유명한 “선한 사마리아인의 이야기(30~37절)”입니다. 그리고 또 같은 말씀을 하십니다. “가서 너도 그와 같이하여라.”
- 율법사처럼 성경에 능통한 성도들이 많습니다.수백의 요절을 토씨 하나 안 틀리고, 암송하는 분들도 많습니다. 하지만 주님께서 원하시는 성도의 참된 삶은 그것도 중요한 것이지만 레위기가 어디에 있고, 신명기서가 신약인지 구약인지 몰라도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절대적으로 믿는 사람이요, 말씀이라면 두말할 것도 없이 순종하고, 그대로 행하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창조주이시고, 구주이십니다. 요한 사도는 태초부터 있으신 말씀이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말씀을 이루려고 오셨다고 했고, 말씀이 아니면 행하지 않았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요한 사도는 요 14:21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이렇게 기록하셨습니다. “내 계명을 받아서 지키는 사람은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요,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아버지의 사랑을 받을 것이다. 그리고 나도 그 사람을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드러낼 것이다."
예수님은 당신을 사랑하는 것과 당신의 말씀을 지켜 행하는 것과 동일시 여기셨습니다. 바꿔말하면 그 외에 사랑의 진위를 판가름할 다른 방법이 없다는 뜻이기도 하고, 설령 말씀에 통달한 자일지라도 주의 말씀을 행하지 않으면 그는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이지 않으며, 그의 믿음도 참되다고 말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왕이신 예수님 앞에서 성도인 우리가 추구해야 할 최고의 가치혁신이란? 어떻게 말씀을 좇아서 행할 것인가? 끊임없이 고민하고 애쓰고 또 애쓰는 것입니다. 이것 말고 그리스도인 됨을 증거할 다른 길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