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복권에 당첨될 확률이 약 814만분의 1이랍니다. 벼락을 열세 번 맞을 확률이랍니다. 알면서도 복권을 삽니다. 이것이 허황되다는 것을 몰라서가 아니라 성실하게 사는 것이, 싫은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거룩한 삶이 싫습니다. 힘이 듭니다. 전도하고, 선교하고, 기도하는 것이 싫은 것에는 영적 게으름이 자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적으로 은혜의 한 방을 노리며 살고 싶어 합니다. 한순간에 성령의 불을 받으면 인생의 문제가 한 방에 끝이 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생이든, 영적이든 게으름에는 공통점이 있는데, 그것은 꿈은 있는데, 그 꿈을 위해 대가를 지불할 마음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개꿈이 됩니다.
- 게으름에도 단계가 있습니다.첫 단계는 의무에(사명) 최선을 다하지 않는 것입니다. 한 달란트 받은 종처럼, 두 번 째 단계는 아예 의무를 저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자기 사랑의 확장인데, 다른 말로 하면, 자신을 하나님의 자리에 두는 것입니다. 옛날에 왕을 죽이는 방법은 자객을 보내는 방법도 있지만 음식에 극소량의 독을 타서 서서히 죽게 하는 것입니다. 게으름이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게으름의 마지막 단계는 정욕, 즉 쾌락입니다. 여기에 빠지면 아예 그 삶에서 하나님이 없게 됩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피 흘리기까지 게으름과 싸워야 합니다.경건한 삶에 싫증을 내지 못하도록,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에 싫증을 느끼지 못하도록, 어떠한 경우에라도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삶을 미루거나 상황이 좋아지면 이라고 해서는 안 됩니다.
* 어느 관공서에서 공사입찰을 알리는 신문광고가 몇 주 전에 나갔습니다.드디어 입찰이 시작되고, 심사를 위한 면접 시간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당일 큰 소동이 일어났습니다. 몇 업체가 당일 입찰보증금을 들고 와서는 응찰하게 해 달라고 항의했기 때문입니다. 사연인즉 관공서 담당 직원이 신문에 광고를 내면서 “이 공사에 응찰할 업체는 공사 금액의 10%를 입찰 전일까지 예치할 것” 해야 하는데, 실수로 ‘전’이라는 한 글자를 빼먹고, “입찰일”까지라고 한 것입니다. 워낙 공사 규모가 큰지라 경쟁이 심한데, 전날까지 입찰금액을 예치한 업체들은 오늘 입찰 금액을 가져온 업체는 응하면 안 된다고 하고, 다른 업체는 광고에 분명 입찰 당일까지라고 했으니 응찰하게 해줘야 한다고 항의를 하니 혼란이 오고, 법적인 문제까지 발생했습니다. 결국 담당 직원은 면직되고, 후에 해직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부주의 혹은 실수라고 합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은 부주의는 게으름의 산물이며, 게으름도 본인의 선택이라고 말씀합니다.
예를 들면, 식탁에서 부주의로 물잔을 엎었습니다.그런데 이게 친구나 가족 같으면, 그냥 넘어가겠지만 만약 왕이 식탁에 앉았다면 문제가 다릅니다. 왕 앞에서의 부주의는 곧 불경이기 때문입니다. 감옥에 갈 사항이고, 때로는 죽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왕 앞에서 부주의란? 있겠습니까? 없겠습니까? 당연히 없습니다. 왜일까요? 죽고 사는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부주의는 결국 집중하거나 최선을 다하지 않는 게으름이 만든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필자는 밭과 포도원이 있는 농원을 지나게 되었습니다.그런데 밭과 포도원에 풀과 엉겅퀴와 가시덤불이 가득하고, 돌담은 무너져 있었습니다. 주인이 없는 게 아닌 밭이었고, 포도원이었습니다. 밭에서 나는 곡물은 양식이고, 포도원의 포도는 물 대신 마시는 포도주의 재료입니다. 이 귀중한 농토가 풀과 엉겅퀴와 가시덤불로 가득했다면, 이 농부는 게으르고, 지혜가(생각) 없는 사람이라고 말씀합니다.(30절)
- 영적인 삶도 마찬가지입니다.특별히 기도의 삶이 안 되는 것은 분명 영적인 게으름입니다. 기도하지 않기 위해 애를 쓰거나 기도하지 않는 법을 배워야 합니까? 그저 게으르면 저절로 기도하지 않게 됩니다. 기도가 바빠서 못하는 것이 아니라, 기도를 스스로 선택하지 않은 것입니다. 어쩔 수 없는 부주의는 없습니다. 어쨌든 집중하지 못하는 게으름이 자리 잡고, 있는 것입니다. 주고 사는 문제라고 생각이 된다면 실수가 용납이 안 되고, 정말 실수가 용납이 안 되는 것에서 실수하면 죽지 않습니까?
그렇기에 성도는 부주의나 나태함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면 안 됩니다. 영적인 삶, 특히 기도의 삶은 죽고 사는 문제입니다. 부주의할 수 없고, 나태할 수 없고, 핑계할 수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