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가 게으름이란 주제를 가지고, 말씀을 나누면서,솔로몬이 게으름에 관해 이렇게나 많이 기록했다는 것을 알고, 놀랐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게으름을 이렇게 심각하게 여기고 있구나, 생각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왜 이리 게으름을 심각하게 여기셨을까요?
- 게으른 사람은 단순히 게으른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특별히 영적 게으름은 더욱 심각합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사리에 맞는 대답을 하는 일곱 사람보다 자기를 더 지혜롭게 여긴다.” 했습니다. 게으름의 특징이 교만하다는 의미입니다. 내세울 신앙도, 이성도 없고, 지혜도 없으니, 그들이 의지할 것이라고는 “고집”뿐인 것입니다. 소신과 고집은 전혀 다른 것입니다. 소신은 확신 속에서 나오는 일관성이지만, 고집은 마치 책 한 권을 읽고, 세상의 이치를 다 깨달은 것처럼, 행동하는 집착입니다. 소신은 더 분명하고, 정확한 것이 나오면 언제든 기존의 것을 버릴 마음이 있지만, 고집은 틀린 줄 알면서도 자신을 꺾지 않습니다. 그러니 게으름이 무서운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솔로몬이 왕으로서 겪은 경험 때문일 것입니다.신하들은 왕에게 계속해서 상소라는 것을 올립니다. 상소란? 왕에게 의견을 피력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일곱이란?완전수를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일곱 사람이 같은 의견을 피력한다는 것은, 단순히 일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 이성적이고, 이치에 맞는 옳은 말을 했다는 뜻입니다. 단지 다수결이기 때문이 아니라, 누가 봐도 분명하고, 옳습니다. 그런데도 고집을 피우고, 자신의 의견이 옳다고 합니다.
유대인 특히 율법사들은 게으르고, 고집이 센 사람들이었습니다.요즘 마가복음의 말씀을 묵상하고 있는데, 분명한 사실조차 예수님의 능력으로 인정하지 않고, 예수님이 악령의 사주를 받아 귀신을 쫓고, 권능을 행한다고 했습니다. 분명하게 구약에서 예수님이 말 구유에서 탄생하실 것을 예언하셨고, 고난과 십자가의 죽음도 예언하셨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예언의 말씀을 무시하고, 고집을 부렸습니다.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구주이신 분이 가난하고, 고난을 받으며, 나무 십자가에서 저주받고 죽을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바울도 그랬습니다. 예수님을 만나 두껍게 가리어진 고집과 아집이 벗겨지고서야 비로서 바르게 성경을 볼 수 있었습니다.
- 그리스도인은 진리의 빛에 노출된 사람들입니다.그래서 주님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세상이 볼 수 없는 주님을 구주로 영접했고, 보이지 않는 천국을 사모하며 삽니다. 하지만 여전히 우리는 하나님을 잘 모릅니다. 주님도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서도 모르는 것이, 너무 많습니다. 그런데도 영적으로 완고하고, 무지하며, 고집으로 말미암아 영적으로 게으르고, 나태한 채 더 알려고 하지 않습니다. 마치 하나님을 다 안 것처럼 교만합니다. 그러니 영적으로 미성숙하고, 하나님께서 쓰시기에 너무 부족한 것입니다.
- 하나님을 알고자 게으름을 타파하고, 고집을 타파하고, 우리의 모든 삶을 거는 용기와 결단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상상을 초월하는 하나님이 세계와 능력으로 말미암아 믿음의 삶이 얼마나 신나는 일인지 비로소 깨닫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