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주 구제와 섬김의 사역을 감당할 사역자를 왜 집사라고 하셨을까? 에 대해집사라는 어원에서 그 이유를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집사라는 어원은 “밥상머리에서 시중드는 자” 혹은 “머슴”이란 의미입니다. 고대 중동에서나 로마제국하에서 머슴, 혹은 노예는 주인이 명한 일만 하는 것이, 아니라 주인의 식사를 준비하고, 시중을 드는 역할도 함께 있었습니다. 그래서 주인이 식사를 끝내고, 잠자리에 들어서야 비로소 노예의 하루의 일과가 끝나는 것입니다.
지난 주일에도 말씀을 드렸듯이세상이 성공하고 출세하려는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섬김을 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노예는 사회의 맨 밑바닥에 있고, 출세와 성공의 폭만큼 점점 높은 곳에 앉게 됩니다. 즉 세상은 피라미드처럼 삼각형 구조입니다. 꼭대기로 올라갈수록 좁고, 자리가 작아집니다. 그러니 피터지게 싸우고, 짓밟아야만 그 좁디좁은 맨 꼭대기에 앉게 됩니다. 피 터지도록 싸우고, 인생을 걸고 얻는 꼭대기이니 자부심도 크고, 이제는 누리고 섬김을 받고 싶은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그 삼각형을 완전히 뒤집어 놓으셨습니다. 혁명보다 더 혁명적인 말씀을 하셨습니다. 섬기는 자가 맨 밑바닥이 아니라 섬기는 자가 맨 꼭대기에 앉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25-26절)에 “예수께서는 그들을 곁에 불러 놓고 말씀하셨다. "너희가 아는 대로, 이방 민족들의 통치자들은 백성을 마구 내리누르고, 고관들은 백성에게 세도를 부린다. 그러나 너희끼리는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 너희 가운데서 위대하게 되고자 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그러므로 집사의 직분을 바르게 감당하고자 하는 사람은 예수님처럼 가치관 인생관이 180도 바뀌어야 합니다. 교회공동체도 바뀌어야 합니다.
1) 집사는 성도로서 교회공동체의 리더인 담임목사에게 순종하고, 조력자이지만 사역자로서는 담임목사의 조력자가 아닌 복음의 한 축인 가난하고, 연약한 이들을 섬기고 구제하는 사역을 위해 부름을 받은 사역자입니다.
- 그래서 교회는 섬기는 자가 가장 거룩하며, 가장 존경과 사랑을 받을 리더이며, 언젠가 하나님의 나라에서 가장 높은 곳에 앉을 사람입니다.
2) 아담을 통해 인간에게 죄가 들어왔고, 그 죄와 함께 굶주림, 질병, 죽음, 헐벗음 같은 악한 역사가 들어왔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 아닙니다. 창조의 계획에도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눈은 가난하고, 연약하며, 어려운 처지에 빠진 이들을 향하여 계십니다. 이런 이들을 얼마나 불쌍히 여기시고, 안타깝게 여기시는지 (마 25:34-40) “34. 그 때에 임금은 자기 오른쪽에 있는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내 아버지께 복을 받은 사람들아, 와서, 창세 때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준비한 이 나라를 차지하여라. 40. 임금이 그들에게 말하기를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여기 내 형제자매 가운데,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다' 할 것이다.”
- 그러므로 모든 성도는 연약하고, 가난하며, 병든 이들을 불쌍히 여기고 도와야 할 의무를 가진 사람들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집사는 구제와 섬김의 리더가 되는, 즉 가장 앞장서서 걸어가는 사역자입니다. 특별히 교회 안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왜? 어떤 가난한 사람이 구원받았다고 해서 그날로 가난이 해결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3)(고후 8:1-3) “1.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께서 마케도니아 여러 교회에 베풀어주신 은혜를 여러분에게 알리려고 합니다. 2. 그들은 큰 환난의 시련을 겪으면서도 기쁨이 넘치고, 극심한 가난에 쪼들리면서도 넉넉한 마음으로 남에게 베풀었습니다. 3. 내가 증언합니다. 그들은 힘이 닿는 대로 구제하였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힘에 지나도록 자원해서 하였습니다.”
- 고린도후서를 기록할 당시 이스라엘 근동이 엄청난 기근에 시달렸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아시아와 유럽의 교회들에게 예루설렘교회를 돕는 구제를 요청했습니다. 그러나 가장 부유했던 고린도교회는 머뭇거렸고, 가장 가난한 마케도냐 교회는 바울의 만류에도 오히려 강력하게 참여를 요청했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은혜, 그리스도의 은혜를 안다면 그래야 한다고 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