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 믿는 사람들은 술 한 잔 먹으면서 화해하면 전처럼 다시 친해지고 좋아지는데 예수 믿는 사람들은 왜 한 번 비틀어지면 다시 화해하는 것이 어려울까요? 예수 믿는 사람들의 마음이 안 믿는 사람보다 더 좁은 것 같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요? 아닙니다. 외형상 그렇게 보이는 것뿐입니다. 안 믿는 분들은 우리처럼 자주 만날 이유도, 깊이 교제해야할 이유도 없습니다. 그러니 굳이 껄끄러운 관계를 오래 지속해야 할 이유가 없을 뿐입니다. 다시 말하면 안 만나면 그뿐인 남남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만약 손익이 개입되어도 술 한 잔 먹으며 내가 손해보고 말지요 하며 탁탁 털어버리고 화해하는 것이 가능할까요? 손익이 개입되어 있는 곳에는 부부사이도, 심지어 형제사이도 원수가 되는 세상입니다.
그러나 어쨌든 예수 믿는 우리에게 부끄러운 모습이 있는 것만은 사실입니다. “철이 철을 날카롭게 하는 것같이 사람이 그 친구의 얼굴을 빛나게 하느니라.(잠 27:17)
성경은 갈등을 부정적인 것만으로 보지 않습니다. 갈등을 통해 온유하고 성숙한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기도 하고, 자신의 단점과 부족함을 발견하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갈등이 두려워 피하고 도망치면 성장이 없습니다. 그리고 숨겨진 문제들이 들어나지 않은 채 썩어갑니다. 갈등은 아프고 때로 상처를 냅니다. 그러나 덮어지고 숨겨진 문제는 암처럼 서서히 조직을 죽게 합니다. 무엇이 더 무서운 것입니까?
예수 믿는 우리가 또 하나 안 되는 것이 있습니다. 앙금(찌꺼기)을 말갛게 씻어 버리는 것입니다. 찌꺼기가 남아 있으면 아무리 새로운 물을 넣어도 깨끗지 않습니다. 조금만 흔들리면 물이 다시 혼탁해 집니다. 용서를 했으면 앙금이 남지 않도록 내 마음에서 깨끗이 씻어버려야 하는데 말로만 용서하고 마음으로 용서하지 않았기에 나도 모르는 사이에 상대를 대하는 태도나 말씨가 좋지 못합니다. 그러면 상대는 미안함에서 서서히 불만과 분노로 바뀌어 갑니다. 앙금이 피해자로 하여금 가해자로 바뀌게 하는 것입니다. 갈등보다 더 나쁜 것은 앙금입니다. 앙금은 한 사람을 바르게 보지 않고 과거의 잣대로 현재를 판단하고 비판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깨끗한 용서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정 안 된다면 헤어져야 합니다. 불신을 품고 동거하느니 헤어져서 평안을 이루는 것이 낫습니다. 그러나 할 수만 있다면 갈등을 두려워 마십시오. 용서하려 했다면 앙금이 남지 않는 깨끗한 용서를 해 보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