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을)기다리고 있겠습니다.
- 어느 분이 생사를 가늠하는 중요한 수술을 앞두고 혹이 수술이 잘못되면 다시 가족들을 보지 못할 수도 있겠구나. 어쩌면 지금 이 순간이 마지막 대면일수도 있겠구나 하고 생각하니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가 몰려왔습니다. 그때 아내가 “나는 당신을 기다리고 있을 거예요. 아니면 당신이 나를 기다리면 되지요.”했습니다.
막연하게 신앙생활을 하던 남편은 그때서야 함박웃음을 지으며 “그래, 고마워 어쩌면 내가 당신을 기다릴 수도 있겠지만 분명한 것은 우리가 다시 만난다는 거지?”
소생의 희망이 없는 환자 앞에서 죽음을 말하는 것은 절대적 금물인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러잖아도 죽음에 대한 공포 앞에 놓여 있은 환자에게 죽음에 대한 이야기는 너무 큰 결례이다 싶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잠간의 불쾌감 때문에 구원의 기회를 놓친다면 이는 한 사람의 인생에 대한 영원한 결례가 될 것입니다. 구원받으면 죽으나 사나 언젠가 다시 만납니다. 죽음이 눈앞에 와 있는 사람일수록 그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 임종을 앞둔 부모가 자식을 보기 전 까지는 죽을 수 없다는 신념을 가지면 얼마간이나마 숨을 이어갑니다. 과거 독일의 나치 수용소나 일제 강점기에 일본의 잔악한 고문도 불구하고 극복하고 살아난 분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차라리 죽는 것이 났다 싶을 만큼 고통스러워서 대부분 삶을 포기하지만 나를 기다리고 있을 누군가 때문에 참야 할 이유가 생기면 상상 이상의 고통도 극복이 가능하다고 합니다.
매일 40초 꼴로 한사람이 죽습니다. 그중 40% 이상의 사람들이 자살이라고 들었습니다. 하지만 자신을 애타게 기다려 주는 사람이 있다고 생각한다면 쉽사리 목숨을 포기할 수 없습니다. 자살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세상에 자신만이 홀로 남겨진 존재요, 자신이 죽어도 아무도 슬퍼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 때문입니다. 인간은 누군가를 위해 살 때 행복한 것인데 그 대상이 없다면 살아야 할 이유가 사라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힘들고 외로운 사람들에게 자신들을 기다려주는 희망이 되어야 합니다. “나는 당신을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이 한마디로 살아야 할 이유를 찾을 수도 있습니다. 더불어 죽음이후에도 나를 기다려 주실 존재가 있음도 알려줘야 합니다. 사랑은 아주 오랜 동안 만들어 지기도 하지만 눈 깜짝할 사이에 만들어지기도 합니다. 그래서 한 영혼을 구원하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