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해하고 있는 다섯 가지
다음은 기독교인들이 자주 사용하는 다섯 개의 상투적 어구입니다. 하지만 전혀 성경적이지 않기에 특히 주의해야 합니다.
첫째, ‘하나님이 문을 닫으실 때면 대신 창문을 여신다. 하나님이 스스로 기뻐하시는 일을 하신다는 것은 진리입니다. 그렇기에 종종 우리가 가는 길을 바꾸시더라도 당신의 뜻을 버리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 인생에서 문을 하나 닫았다고 해서 반드시 창문을 여신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어떤 문도 아예 열지 않으실 수 있습니다. 성경에는 하나님의 자녀가 잘못된 길로 들어가는 것을 막기 위해 문만이 아니라 모든 창문까지 전부 닫아버리는 이야기로 가득합니다.(잠 16:9; 19:21, 행 16:6~7)
둘째, ‘하나님의 뜻 안에 있을 때보다 더 안전할 수는 없다. 여기서 말하는 안전이 영원을 의미한다면 이 말은 참으로 은혜로운 진리의 말씀입니다. 하지만 이 말을 하는 경우 대부분은 육체적이며 현실적인 안전을 말합니다. 몇 년 전 어느 폐쇄 국가에 선교사로 가기 위해 준비하고 있을 때 믿음 좋은 사람들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어떤 위험으로부터도 당신을 지켜주실 겁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여기에 동의하지 않으실 것 같습니다. 이 약속은 모순처럼 들리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타락한 세상에서 끔찍한 삶의 환경은 당연한 일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게 오히려 더 큰 육체적 위험을 초래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반드시 기억할 것은 우리는 영적으로 언제나 살아 있고 영원히 안전하다는 사실입니다.
셋째, ‘여기까지만 하자, 이제 나머지는 하나님이 알아서 하시겠지. 하나님은 하나님이고, 우리는 하나님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경험 변명 두려움 등을 다 내려놓으라는 것입니다. 이 말은 그러나 아주 교묘합니다. 왜냐하면 싸우고 노력하고 인내하는 것에 브레이크를 걸기 때문입니다. 이 말이 우리를 의롭다 하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뿐이라는 의미로 사용한다면 문제가 없습니다. 그러나 이 말을 성화 과정을 묘사하는 데 사용하면서 결과적으로는 수동적 자세를 변명하는 용도로 사용됩니다. 기독교인의 삶은 녹록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이 군인과 운동선수 그리고 농부, 달리기 경주장과 권투 시합장을 예로 든 이유입니다. JI 패커는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기독교인의 모토는 ‘여기까지만 하자, 나머지는 하나님이 알아서 하시겠지’가 아니라 ‘하나님을 믿고 끝까지 밀고 나가자’가 돼야 한다.”
넷째, ‘감당 못 할 일을 하나님은 허락하지 않으신다. 바라는 것은 모두 다 이룰 수 있다고 주장하는 문화 속에서 이런 슬로건은 우리를 격려하고 또 인생이 사실상 그렇게 힘든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시켜 줍니다. 이 말은 하나님은 우리의 한계를 알기에 그 한계를 넘는 일은 시키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문제는 하나님은 우리에게 감당 못 할 정도의 일을 주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렇게 함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는 법을 배우도록 하시고 또 하나님이 당신을 사랑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복음은 이것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일은 허락하지 않으신다’가 아니라 하나님이 감당하지 못할 일을 우리에게 주시는 법은 없다.
다섯째, ‘하나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도우신다. 이 구절보다 더 많이 성경 말씀으로 오해받는 말이 또 있을까? 이 말은 벤저민 프랭클린이 한 말입니다. 하나님이 스스로 돕는 사람만 돕는다면 우리는 모두 죽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도덕적으로 뛰어난 사람만을 위해 오시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도덕적으로 실패한 사람들, 즉 우리를 위해 오셨습니다. 기독교의 핵심은 찰스 스펄전 목사가 말한 바와 같습니다. “하나님은 스스로 도울 수 없는 사람들을 도우신다.”
-맷 스맷서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