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주의가 주는 피해
요즈음 장래의 직업에 대해 고민하는 청년들에게 보통 세상이 해 주는 권고는 네가 좋아할 수 있는 일, 네가 잘 할 수 있는 일, 세 번째는 보수도 충분히 받을 수 있는 직업을 선택하라고 합니다. 저의 학창시절에는 직업의 삼대 요소로 자아실현, 충분한 보수, 여가의 활용이었습니다. 하지만 돈도 많이 벌고, 여행도 다니면서 자아가 실현이 되는 직업이 있기는 한 걸까 하는 생각을 했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만약 저의 부모님 때의 분들에게 직업의 목적을 묻는다면 국가 재건, 가족의 생계, 그리고 자녀의 대학 교육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서구 사회의 정신적인 기조인 개인주의는 끊임없이 심화의 과정을 걸어 왔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네가 원하는 것이 ‘절대선’이다. 라는 메시지가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TV, 영화, 소설, 그리고 책을 통해서 우리에게 끊임없이 전달됩니다. 그것이 진정한 인간이 되는 길인 것처럼, 그 안에 진정한 행복이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래서 지금은 내 감각적 욕구에 따라서 내가 남자인지 여자인지도 결정하고, 내 감각적 욕구에 따라서 누구와 결혼할 것인지도 결정합니다.
물론 하나님은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나의 안에 ‘불씨’처럼 심어 두셨기 때문에 내 깊은 속의 갈망을 전혀 무시할 수는 없습니다. C.S. 루이스는 내 안에 있는 갈망이 하나님이 주신 소명의 열쇠일지 모르니 무시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내 안에는 하나님께서 심어주신 갈망도 있겠지만 죄스럽고 망가진 죄악된 갈망이나 죄된 세상이 심어준 잘못된 가치관에서 오는 갈망도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가운데 어떤 것이 진짜인지를 어떻게 발견할 수 있겠습니까? 성경이 그 해답으로 주고 있는 것이 바로 공동체입니다.
첫 째는 부모와 함께 하는 가족공동체이고, 거기서 성장하면 그 다음에는 부모를 떠나서 배우자와 만드는 공동체, 그리고 우리가 자연스럽게 몸을 담는 신앙의 공동체입니다. 그 안에는 나의 권리도 있지만, 그에 상응하는 책임도 있어서 그 공동체의 일원이 되어서 상대방을 배려하고 존중하고 때론 희생하면서 자리를 지키다 보면, 그 다양한 관계의 역동성 속에서 잘못된 갈망은 사라지고, 진정한 갈망과 소명이 보석처럼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거기에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기초되어 있어야 합니다.
서구의 개인주의는 공동체를 위한 희생과 양보와 책임을 쓸모없는 것으로 헌신짝처럼 버리도록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남이야 어떻든지 상관하지 말고 내 안을 들어다 보고 네가 원하는 것을 추구하라고 부추겼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발견된 왜곡된 자아상은 나를 불행하게 할 뿐 아니라 사회를 불행하게 합니다. 지금 우리는 그런 개인주의가 만들어 가는 결과를 보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