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학교에서 조직신학이라는 기독교교리를 공부하는 시간이 있습니다. 특히 구원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공부할 때면 치열한 논쟁이 벌어지곤 합니다. 믿었기 때문에 회개한 것인가 아니면 회개했기에 믿음이 시작된 것인가? 이런 것들입니다.
제가 젊었을 때에는 회개했기에 믿음이 시작된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이제 나이가 들고 보니 믿음이 먼저이고 회개가 나중인 것이 가능하겠구나 하고 생각합니다. 누가복음 15장의 탕자의 비유에서 탕자는 회개했기 때문에 아버지가 받아준 것일까요? 아닙니다. 아버지는 탕자가 집으로 돌아오는 일에 아무런 조건을 걸지 않았습니다. 그저 돌아오기만을 기다렸고, 탕자가 돌아 왔을 때에는 온 마음과 진심으로 기뻐하고 환영했습니다. 물론 이것 때문에 큰 아들이 화가 나기도 했지만 탕자는 아버지의 무한한 사랑을 경험한 후에 진정으로 뉘우치고 회개했습니다. 그리고 자발적인 삶에 변화와 아버지를 향한 무한 신뢰와 사랑이 시작되었습니다. 엄밀히 따지면 우리도 탕자와 같은 과정으로 구원받았습니다. 우리가 먼저 하나님을 찾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찾아 주셨고, 용서해 주셨고, 구원해 주셨습니다. 회개했기에 믿음이 시작된 것 같지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사랑이 먼저 시작되지 않았다면 누가 하나님을 찾으며, 자신의 죄에 되하여 자각하겠습니까?
목장공동체 안에서 종종 예기치 못한 일들이 일어나기도 하고 또 예기치 못한 일원이 공동체로 들어오기도 합니다. 그때 우리의 태도는 “당신이 정말 회개하고 삶의 변화를 보이면 우리의 공동체 일원으로 받아 주겠다.”고 합니다. 하지만 목장공동체는 먼저 용서하고 이웃을 마음으로 받고 담당하리라는 각오가 있어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자 사람, 어떻게 그럴 수 있어요?“라든지 “저런 사람이 어떻게 우리의 공동체 일원이 될 수 있어요?” 아니라 “그래서 저사람 곁에 내가 필요하겠구나.” 이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후 목원들의 진실한 사랑과 용서가 사람을 바꾸게 됩니다. 강요에 의해 회개하고 변화된 것이 아니라 사랑의 경험을 맛보고 회개하고 변화된 것이기에 더 큰 사랑과 용서의 사람이 되고 겸손하고 감사한 사람이 됩니다. 이것이 건강한 부부관계의 본질이고, 가족의 본질이라면 목장도 같습니다.
밥퍼 목사님이(최일도) “한 핏줄이기에 가족이지만 가족이 되었기에 한 핏줄이 되었다” 했습니다. 일단 가족으로 먼저 받아들이고 사랑과 섬김으로 대하면 어느 샌가 피를 나눈 가족이 된다는 뜻입니다. 이는 우리에게 커다란 십자가처럼 지기 힘든 것이지만 그래도 져야만 하는 십자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