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령이 가난한 자
오늘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죽음을 위해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종려주일이며, 고난주간의 시작점에 놓인 주일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는 어떠냐?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마 16:15)하고 물으셨습니다. 그러자 베드로는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이 아들이십니다.”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런 베드로의 고백이 기쁘셨습니다. 그리고, 비로소 당신의 고난과 죽음과 부활에 관해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베드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가 왜 고난과 죽임을 당하셔야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붙잡고 거칠게 예수님께는 그런 일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고 항의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그런 베드로의 말과 행동을 사탄의 행위로 보시고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마 16:24)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따르려면 “자기를 부인”해야 한다하셨습니다. 자기를 부인한다는 말은 주님만을 사랑하고, 주님께만 순종하기 위해, 자신의 교만과 자아와 자존심을 버린다는 의미입니다.
4월이 되면 제비들이 돌아옵니다. 처마 밑에 집을 지은 제비는 보통 5-7개의 알을 낳고 부화시킵니다. 그러면 제비부부는 정말 쉴 새 없이 먹이를 물어다 먹여야 합니다. 그런데 6-7마리나 되는 그 많은 새끼들에게 어떻게 치우치지 않고 먹이를 먹일 수 있을까요? 어미가 먹이를 물어오면 새끼들은 저마다 입을 크게 벌리고 자신들에게 먹이를 달라고 아우성인데 이미 먹이를 먹은 새끼와 먹이를 먹지 않은 새끼가 벌리는 입의 크기가 다르답니다. 먹이를 먹지 않은 새끼의 입이 훨씬 크게 벌어지기 때문에 어미는 새끼의 입을 보고 순서대로 먹이를 먹인답니다.
우리의 마음에 교만과 자존심, 자아가 가득하게 되면, 주님을 향하여 마음을 열지 않습니다. 기도하지 않습니다. 간절하지 않습니다. 주님은 “심령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 하셨습니다. 교만과 자존심, 자아가 남아 있지 않고 비어있는 가난한 심령은 복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을 향해 영혼의 입을 크게 벌리고, 주실 은혜와 능력을 너무도 간절하게 사모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고,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