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뜻 앞에서
신앙생활과 교회 사역을 하다보면 선택의 기로에서 갈등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일반적인 판단에 있어서는 하나님을 더 신뢰하는 쪽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자식의 진로를 선택할 때, 부모의 역할과 하나님의 교회에서의 직분자로서(집사, 혹은 목자, 예배생활) 역할이 충돌할 때가 있습니다. 부모의 역할을 선택하면 직분자로서의 역할이 어렵고, 직분자로서 혹은 성도로서의 역할을 선택하면 부모로서의 역할을 포기해야하기 때문입니다. 이럴 때, 말씀 앞에 서면 분명해 집니다.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하셨습니다. 부모의 역할은 하나님께서 대신 책임져 주실 수 있지만 직분자로서 성도로서의 역할은 나에게만 주어진 역할이기에 이것은 하나님께서 대신하여 주실 수 없습니다. 그래서 사사기에 나무들의 우화에서도 포도나무, 감람나무는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맡겨주신 역할을 버리고, 나무들의 왕이 될 수 없노라고 선언합니다. 왕은 다른 나무들도 할 수 있지만 감람나무, 포도나무의 역할은 다른 나무가 대신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또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아주 오랜 시간 묵묵히 하나님의 인도하심의 시간과 때를 기다려야 할 때가 있는데, 그럴 때면 혹 하나님의 뜻을 핑계로 내가 해야 할 일, 부모로서 해야 할 일을 하지 않거나 세상에 뒤처지거나 게으름을 피우는 것은 아닐까 생각이 들고 의문이 생깁니다. 그럴 때에도 그럴 가능성을 감수하고서라도 하나님을 기다리는 쪽으로 선택합니다. 지나간 역사를 돌이켜보면 하나님께서 분명한 길을 보여주시지 않거나 뜻을 보여주시지 않을 때에는 대체로 두 가지 중 하나입니다. 너무도 분명하게 말씀에 제시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 대하여 자신들의 계획과 뜻에 암묵적인 동의를 요구할 때이거나 하나님께서 동의하지 않고 계심을 침묵으로 말씀해 주실 때입니다. 가끔 성도들도 이미 모든 일을 다 결정하고, 계획하고는 저에게 일방적인 통보를 합니다. 그리고는 저와 밥 먹자고 합니다. 본인들은 의식하지 않았을지 모르지만 저는 암묵적인 동의를 요구하는 것으로 여겨져서 마음이 상합니다. 그럴 때 저는 침묵합니다. 이미 뭔가를 결정한 사람들은 무슨 말을 해도 바꾸지 않을 것을 알기에 의미 없는 말을 하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때로 비중이 같은 선택의 기로에 섭니다. 그럴 때는 내게 손해가 되고 양보하는 쪽을 선택합니다. 양보할 것인가? 권리를 주장할 것인가? 갈등이 되지만 설사 내 권리가 옳다하여도 하나님께서 대신 싸워주시도록 손해를 선택할 때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