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살아 계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 님의 얼굴을 뵈올까
3. 사람들이 종일 내게 하는 말이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뇨 하오니 내 눈물이 주야로 내 음식이 되었도다.
요즘 대부분 종교가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기독교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니 더욱 그렇습니다. 갈수록 목회자 수가 줄어들고, 신자 수도 급감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젊은 세대는 종교에 그다지 관심이 없습니다. 종교적 제도와 격식도 좋아하지 않습니다. 앞으로 한 세대만 바뀌어도 종교의 지형도는 굉장히 달라질 것 같습니다. 교리라든가, 율법이라든가, 종교적 제도가 그다지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런 것들은 단지 종교의 문화유산 정도로 여겨지게 될 거라 봅니다.”
하지만 그럴수록 순수하고 단순하게 예수의 영성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영성은 멀리 있지 않습니다. 수년 전 중국 호텔에 갔을 때 재미난 문구를 봤습니다.‘우리 호텔의 목적은 고객들이 여기서 묵고 가는 것이 아닙니다. 고객들이 여기서 즐거움과 평화를 얻는 것이 목적입니다.’ 그렇게 적혀 있었습니다, 그게 뭘까요. 말하자면 그것이 그 호텔의 영성입니다. 만일 어떤 기업가가 물건을 팔면서 돈만 벌기 위한 게 아니라, 사람들이 더 편리하고 행복해졌으면 좋겠다는 목적으로 일하면 어떻습니까. 그게 그 기업의 영성이 됩니다. 가령 중국집 셰프가 자장면을 수타하면서 ‘한 그릇 팔면 1000원, 두 그릇 팔면 2000원’ 식으로만 생각하지 않고, 이 음식을 먹고 누군가 더 건강하고 행복해지면 좋겠다며 일하면 어떨까요. 그건 요리사의 영성이 됩니다. 그런 면에서 우리도 마음을 열어서 보면 영성은 멀리 있지 않습니다.”
기독교의 역사와 전통을 들여다보면 구체적인 방법론이 있습니다. 가령 영성 수련이나 관상기도 등 기독교식의 명상이 이 에 해당합니다. 가톨릭에는 영성수련과 관상기도 등 풍성한 명상 전통이 있습니다. 반면 개신교는 ‘명상’이라는 단어에 대해 상당한 거부감을 느낍니다. 중세 때 그리스도교는 상당히 타락했습니다. 당시 ‘예수로 돌아가자, 성경으로 돌아가자’는 종교개혁을 통해 개신교가 생겨났습니다. 당시 개신교는 가톨릭에 전해져 내려오는 숱한 전통을 거부했습니다. 그때 가톨릭의 수도와 명상의 전통도 덩달아 거부한 겁니다. 그래서 지금 개신교는 가톨릭에 비해 ‘기독교식 명상법’이 너무나 빈약합니다. 그나마 남아 있는 게 묵상과 큐티(Quiet Timeㆍ성경 읽기와 짧은 묵상) 정도입니다.”
오늘 본문 시편 42편에 ‘목마른 사슴이 시냇물을 갈구하듯이, 내 영혼이 주님을 찾아 목이 마르다’는 구절이 있습니다. 저는 이게 ‘영성적 욕구’를 표현한 것이라 봅니다. 개신교에서는 명상에 대한 오해가 많습니다. ‘명상’이라고 하면 불교의 명상, 인도의 명상을 떠올리기 때문입니다. 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도 명상이고, 성경을 읽고 난 뒤의 묵상도 명상입니다. 예수님도 명상을 하셨습니다. 바울도 명상을 했습니다. 기독교의 영성 수련이 바로 기독교의 명상입니다. 서론에서 호텔의 영성, 기업의 영성, 요리사의 영성에 대해 말했는데, 모두에는 공통분모가 있습니다. ‘본질적 의미와 가치’를 찾아간다는 겁니다. 기독교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독교의 존재 이유, 그걸 찾아가는 게 영성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를 위해 끊임없이 명상해야 합니다. 예수께서 갈릴리 호숫가에서 제자들에게 들려주신 메시지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과 이웃과의 관계가 회복되는 것이고, 또 하나는 예수로 말미암아 본래 하나님의 인간창조의 모습으로 회복되는 것이었습니다. -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