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는 기도할 때에 위선자들처럼 해서는 안 된다. 그들은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이려고 회당과 한길 모퉁이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한다.”(마 6장 5절)
바리새인들은 하루에도 몇 차례씩 기도를 올렸습니다. 길을 가다가도 정해진 시간만 되면 멈춰 서서 기도를 했습니다. 그때는 왕이 인사를 건네도 소용이 없고 기도가 우선입니다. 기도를 마친 다음에야 왕에게 절을 했습니다. 어쩌면 우리도 바리새인을 닮아가고 있는지 모릅니다. 특히 기도를 잘하느냐, 못하느냐를 따질 때, 그 기준은 유창함과 매끄러운 말투로 막힘없이 기도할 때 우리는 기도를 참 잘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긴 기도’를 ‘긴 축복’과 동일시하기도 합니다. 바리새인들도 그랬습니다. 기도의 격식과 양을 중시했습니다.
우리나라 교회에서는 ‘40일 특별 새벽기도’, ‘100일 특별 새벽기도’를 종종 합니다. 하루도 빠지지 않고 출석 도장을 받고 나면 왠지 뿌듯해집니다. 무언가 특별한 종교적 공로가 쌓이는 느낌도 받습니다. 일부 교회에서는 단 하루도 결석을 하지 않은 이들에게 개근상으로 성경책을 주기도 하는데, 표지에 ‘40일 특별 새벽기도’라는 문구가 찍혀 있는 성경책입니다. 일종의 훈장인 셈입니다. 우리는 그런 성서의 표지를 남들에게 자랑하고 싶었던 적은 없을까. 다른 사람 눈에 띄도록 표지를 바깥으로 하여 들고 다닌 적은 없을까. 남들이 들으라고 큰 소리로 “아멘!”이나 “할렐루야!”를 외친 적은 없을까. 그런 행동이 회당과 한길 모퉁이에 서서 기도하는 바리새인들과 뭐가 다를까요?
예수님의 기도는 달랐습니다. 오히려 그런 이들을 “위선자”라고 불렀습니다. 그들의 기도는 마음을 뿌듯하게 합니다. 그런데 그런 뿌듯함은 늘 문제가 됩니다. 그걸 먹고서 ‘에고(자아)’가 자라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기도는 방향이 달랐습니다. ‘나’를 키우는 기도가 아니고, 기도를 통해 ‘나’가 작아지고 작아지고, 작아져서 결국은 그리스도 안으로 사라지는 기도였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이들을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이라 불렀고,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라고 덧붙였습니다.
그런데 ‘살다 보면 뿌듯함이 생길 수도 있지, 어떻게 그런 생각을 아예 안 할 수가 있나?’ 맞습니다. 뿌듯함은 얼마든지 생길 수 있습니다. 대신 그때그때 ‘포맷’해야 합니다. 마음에 뿌리를 내려 에고를 키우는 거름이 되기 전에 말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포맷을 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을 향해 영광을 돌리면 됩니다. 모든 것이 그분을 통해 생겨났으므로. ‘하나님을 향한 위탁’의 삶을 살 때 비로소 포맷이 이루어집니다.
예수님은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라. 그렇게 하여 네 자선을 숨겨두어라.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주실 것이다”(마 6장 3~4절)라고 하셨습니다. 오른손도 나의 손이고 왼손도 나의 손입니다. 어떻게 한쪽 손이 하는 일을 다른 쪽 손이 모를 수가 있을까요. 여기에는 대체 무슨 뜻이 담겨 있을까요? 예수님의 메시지의 핵심은 ‘세상에 알리느냐, 마느냐’가 아니라 ‘내 마음에 남느냐, 남지 않느냐’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다 몰라도 내 마음에 뿌듯함이 남으면 어찌하나. 그 뿌듯함이 뿌리를 내리면 어찌하나. 그걸 먹고 에고가 자라면 또 어찌하나. 이것이 걱정인 것입니다. 즉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라.”라고 할 때의 왼손은 ‘내 마음’입니다. 내 마음이 몰라야 합니다. 기억하지 말라는 이야기가 아니라 기억에 달라붙어 있는 뿌듯함을 털어내라는 말입니다. 내 안의 ‘뿌듯함’이 포맷될 때 비로소 자선을 숨겨두게 됩니다.
기도도 똑같습니다. 예수님은 “너는 기도할 때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은 다음, 숨어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여라.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주실 것이다.”(마 6장 6절)하셨습니다.
예수는 왜 골방으로 들어가라고 했을까. 그리고 왜 문까지 닫으라고 했을까요. 왜 그냥 ‘아버지께’가 아니라 ‘숨어 계신 아버지께’ 기도하라고 했을까요. 바리새인들은 ‘회당’이나 ‘광장’에서 기도했고, 예수님은 ‘골방’에서 기도하라고 했다. 회당이나 광장은 바깥입니다. 바리새인의 기도는 바깥을 향합니다. 예수님의 기도는 다릅니다. 골방을 향합니다. 그러면 그 골방은 어디일까요. 나의 내면입니다. 내 안을 향해 깊이, 더 깊이 닻을 내리는 일입니다. 그럼 “문을 닫으라.”라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바깥을 봉쇄하라는 말입니다. 기도의 방향은 내면을 향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아버지는 어디에 숨어 계실까요. 내 안입니다.우리 모두의 내면에 하나님이 창조했던 ‘아담의 속성’ 다시 말해 ‘신의 속성’이 숨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곳을 향해 기도의 닻을 내리라고 합니다. 기도가 바깥을 향하면 에고가 생깁니다. 내면을 향할 때 나는 없고 하나님 만이 계십니다. 그래서 주님은 골방의 문까지 닫으라고 했습니다. 그럴 때 우리의 기도가 ‘숨어 계신 아버지’를 향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야 통하기 때문입니다.
기도란 무엇일까요. ‘바램’입니다.무엇을 바라는 걸까요. 하나 되기를 바라는 일입니다. 땅과 하늘의 하나 됨입니다. 왜냐하면 이를 통해 나와 하늘이 하나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내가 너희 안에 거하듯이, 너희가 내 안에 거하라.”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