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포도나무는 사과나무나 감나무처럼, 과실을 위해 존재하는 나무입니다.그렇기에 과실을 맺지 못하는 포도나무는 존재해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은 포도나무이신 예수님의 가지라고 하셨으니 성도의 삶에는 반드시 맺어야 할 열매가 있습니다. 그 열매가 무엇이겠습니까? 그 열매가 무엇인지에 대해, 지난주 본문에서 “서로 사랑하는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서로 사랑한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이겠습니까? 롬 12:15에서 바울은 “기뻐하는 사람들과 함께 기뻐하고, 우는 사람들과 함께 우십시오.”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사랑은 동감하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포도나무이신 주님의 가지로서 후배들에게 밑가지가 되어 주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알다시피 가장 최근에 생긴 가지일수록 맨 위쪽에 위치합니다. 그리고 이 가지에 열매가 맺습니다. 그런데 가장 오래되고 굵은 가지가 자신이 선배이니 맨 위로 올라가겠노라고 하면, 그 가지의 무게로 인해 얼마 후 나무마저 무게를 못 견디고 부러지거나 휘거나 꺾일 것입니다. 교회가 왜 분란이 일고, 시끄러운가요? 서로 윗가지가 되겠다고 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그러나 너희끼리는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 너희 가운데서 위대하게 되고자 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너희 가운데서 으뜸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한다(마 20:26-27).” 하셨습니다. 주님은 가장 높은 곳에 계셔야 하는 분이시지만 인간보다 더 낮은 곳에 임하셔서 밑가지가 되어 주셨습니다.
- 1800년대 일본의 대표적 화가였던‘후쿠사이’와 그의 친구와의 일화가 있습니다. 어느 날 친구가 찾아와 수탉 그림 하나를 요청했습니다. 닭 그림은 물론 동물 그림을 한 번도 그려보지 못한 후쿠사이는 친구에게 일주일 후에 오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일주일 후에 찾아가니 다시 일주일, 그렇게 차일피일 미루기를 3년의 시간이 흘렀습니다. 3년의 어느 날 후쿠사이는 또 미루려고 하기에 화를 크게 냈습니다. 그러자 후쿠사이는 잠시 기다리라고 하고는 물감을 가져와서 즉석에서 수탉 그림을 그려서 줬습니다. 그런데 그림이라고는 안 믿어질 만큼, 마치 살아 움직이는 닭 같았습니다. 그러자 친구는 더욱 화가 났습니다. 이렇게 몇 분이면 그릴 그림을 왜 3년이나 밀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후쿠사이는 자신이 그림을 그리는 화실로 인도했습니다. 친구는 깜짝 놀랐습니다. 밤낮으로 습작한 그림이 수백은 되어 보였기 때문입니다. 후쿠사이는 비록 친한 친구의 가벼운 요청이었지만 화가로서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는 그림을 선물하고 싶지 않았고, 3년이 넘도록 그리고 또 그리며 자신이 만족할 때까지 그려온 것입니다. 로크마크라는 교수는 “예술은 변명을 요하지 않는다.”했습니다. 예술은 타고난 재능이 있어야 하는 것이 맞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타고난 재능이 있어도 피나는 훈련이 없으며, 명작이 나오지 않습니다. 바울도,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도 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야고보는 "너에게는 믿음이 있고, 나에게는 행함이 있다. 행함이 없는 너의 믿음을 나에게 보여라. 그리하면 나는 행함으로 나의 믿음을 너에게 보이겠다(약 2:18)." - 누구든 믿음으로 구원받고, 성도가 됩니다. 하지만 모든 성도가 구원받는 자답게 사는 것은 아닙니다. 치열한 기도와 처절한 믿음이 훈련이 있어야 참다운 성도가 되는 것입니다. 사랑의 열매도 같습니다.
* 지난주 사랑이란 열매는 기쁨과 슬픔을 동감하는 것, 그리고 밑가지가 되는 것이라고 했는데,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은 사랑은 전적인 수용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 아프리카 공화국 흑인 빈민촌에서 사역하는 한국 선교사님이 있습니다. 이곳 빈민촌은 모두 흑인이고, 선교사님과 사모님 두 분만 피부색이 다릅니다. 흑인을 만나신 적이 있는 분은 유독 흑인만의 특이한 냄새가 강한 것을, 느낄 텐데, 심지어 이 특이한 냄새에 적응하지 못하면 어지럽고 쓰러지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두 분은 흑인 6천여 사람들과 함께 생활하고, 예배실이 좁아서 무더위 속에서 수백명이 모이기도 하는데, 사실 무덥고 좁은 공간에서는 같은 민족도 힘이 듭니다. 그런데, 이 두분은 전혀 그런 냄새를 모르겠다는 것입니다. 물론 오랫동안 함께 살았기에 적응이 된 탓도 있겠지만 정말 중요한 것은, 그들을 사랑하고, 불쌍히 여기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은 작고 작은 이스라엘 민족을 왜 선택하셨는지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인간과 하나님은 전혀 다른 존재입니다. 한마디로 하나님은 창조주이시고, 유일하신 신입니다. 인간은 그냥 피조물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인간의 모든 것을 수용하시기로 하셨고, 사랑하시기로 하셨습니다. 인간은 가장 중요한 부분이 같고 아주 작은 부분이 다릅니다. 그런데도 그 작은 것을 수용할 수 없어서 미워하고, 살인하고, 전쟁도 불사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달라도 너무 다른 우리를 사랑으로 다 수용하셨습니다. 사랑은 전적인 수용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