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너희를 사랑하였노라 하나 너희는 이르기를 주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나이까 하는도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에서는 야곱의 형이 아니냐 그러나 내가 야곱을 사랑하였고
3. 에서는 미워하였으며 그의 산들을 황폐하게 하였고 그의 산업을 광야의 이리들에게 넘겼느니라.
살다 보면 기쁘고 좋을 때가 교차합니다.때로 극도로 괴롭거나 마음이 힘들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코로나로 인해 모두가 힘들어하는 시간에도 추운 계절이 지나고 꽃피는 아름다운 봄이 왔습니다. 우리의 신앙과 일상생활도 마찬가지로 누군가는 기쁨과 감사로 예배드리며 일상에서 하나님의 일하심에 동참하지만, 누군가는 불평과 원망으로 살아갑니다. 신앙생활에도 기쁨이 사라져 형식적인 예배, 마지못한 헌금, 의무적인 봉사를 합니다. 교회 사역에는 동참하지도 않으면서 비난이 앞섭니다. 모든 삶에 중심이 되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이며 그것은 예배를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하나님을 예배하는 동기는 기쁨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기쁨은 어디에서 오는 걸까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어린 시절 커가면서 우리 부모님이 친구 부모님들보다 나이가 많음을 알게 되고, 동네에서 가장 가난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사춘기를 보내던 어느 날 “엄마 아빠가 나에게 해준 게 뭐 있어?”하고 어머니께 한마디 툭 던집니다. 다른 집 아이들처럼 넉넉히 필요를 채워주지는 못하셨지만, 최선을 다해 희생하며 사랑으로 키워주셨을 텐데 자식 입에서 그런 말을 들었으니 어머니의 가슴이 얼마나 아프셨을까? 나이가 들어 자식을 낳고 키우다 보니 사춘기가 된 자식들로부터 똑같이 그런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열 번 잘해줘도 한번 좀 아쉬우면 이전에 사랑과 은혜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불평과 원망이 쏟아집니다.
오래전 부모님 모두 돌아가셨지만 어쩌다 생신이나 명절에 찾아뵈러 시골에 가면 얼마 되지 않은 용돈마저 쓰시지 않고 모아두었다가 차비로 쓰라고 주머니에 넣어 주시곤 했습니다. 지금은 장모님이 그러하십니다. 그 이후에도 저나 아내에게 차비라는 명목으로 오히려 드린 용돈보다 더 주실 때가 많았습니다. 여러 자식 있지만, 막내라고, 목회하며 고생한다고 특별히 마음을 더 써주셨던 것 같습니다.
본문 말라기서의 말씀을 보면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향해“나는 너희를 사랑한다. 나주가 말한다.”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증거가 어디에 있습니까?” 하고 따져 묻습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을 선택하여 사랑하시고 에서는 미워하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조상인 야곱이 선택받은 이유가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어떤 자격이나 조건을 가졌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선택하셨을까요? 아닙니다. 그냥 사랑입니다. 패역한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우리를 무엇으로 사랑하셨냐고 따져 묻고는 그들이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의 제물이라고는 더러운 빵, 병들고 온전치 못한 짐승, 아무 데도 쓸모없는 것들로 드려 하나님의 거룩한 성전을 더럽히고 하나님을 업신여겼습니다. 2장에도 가면 하나님의 그 크신 사랑을 무시한 채 배신하고 우상을 섬기며 음란이 행합니다.
바울은 하나님이 우리를 무엇으로 어떻게 사랑하셨는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습니다. 이리하여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실증하셨습니다.”(롬 5:8) 그렇습니다. 사랑하는 아들 예수님을 내어 주시기까지 사랑해 주셨습니다. 당신의 전부를 드려 사랑해 주셨습니다. 이 은혜를 깊이 깨달을 때 믿음에 철이 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예배함이 행복하고 기쁨이 됩니다. 은혜를 깨닫지 못하면 하나님께서 무엇으로 사랑했냐고? 언제 사랑했냐고? 해 준 것이 무엇이냐고 불평과 원망하게 됩니다.
지치고 마음이 매우 힘든 시기입니다. 저도 그렇습니다. 그럴 때마다 하나님의 은혜 앞으로 가야합니다. 그러면 갑자기 막혔던 샘물이 솟듯 마음에 평안과 기쁨이 찾아옵니다. -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