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릴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사람은,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과, 하나님은 자기를 찾는 사람들에게 상을 주시는 분이시라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 중국 한나라 시절, 티베트의 유목민이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처음에는 작은 소수민족이 일으킨 반란인지라 별것 아니라고 생각해서 진압군을 보냈는데, 대패를 하였습니다. 뿐만이 아니라 금성이라는 아주 중요한 성읍이 반란군의 수중에 떨어졌습니다. 그러자 다급해진 황제 선제가 백전노장인 조충국을 불러 어떻게 하면 반란군을 토벌할 수 있을 것인가? 물었습니다. 그때 조충제의 대답이 그 유명한 “백문이 불여일견”입니다. 즉 백 번 듣는 것보다 실제 한번 보는 것이 더 효과적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황제의 명을 받은 조충제가 실제 전쟁터에 숨어들어 살펴본 결과 기병이 아닌 보병이 농사꾼으로 변장하여 때를 기다리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거의 일 년을 기다린 끝에 마침내 기습적으로 공격을 감행하여 일반백성들의 인명피해가 없이 반란군을 제압하였습니다.
- 백문불여일견이란?사람의 청력이 인간의 시력에 비해 100분의 1 수준이란 의미입니다. 그러면 인간의 시력은 대단한가? 그렇지 않습니다. 인간의 눈은 너무 멀어도 볼 수 없고, 너무 가까워도 볼 수 없습니다. 너무 커도 볼 수 없고, 너무 작아도 볼 수 없습니다. 뿐만이 아니라 눈앞에 장애물이 있어도 보지 못합니다. 그래서 백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의 속은 알지 못합니다. 한치 눈앞의 일도 보지 못한다는 말도 있습니다. 내일은커녕 사실 한 시간 두 시간 후의 일도 전혀 알지 못하는 것이, 인간의 눈입니다. 하물며 인간의 청력이겠습니까?
그러니 인간이 하나님을 알려 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고, 미련한 짓입니다. 그래서 “믿음”이 필요한 것입니다. 본문 1절에서도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확신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라고 했습니다. 보이지 않고 볼 수도 없으니 믿음이 요구된다는 것입니다. 2절에서는 “선조들은 이 믿음으로 살았기 때문에 훌륭한 사람으로 증언되었습니다.”했습니다. 믿음의 선배들이, 하나님께 인정받은 것은, 눈으로 보거나 귀로 듣는 것으로 하지 않고 믿음으로 살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믿음으로 산다면 다 되는, 것인가?그렇다면, 미신이나 다른 여타의 종교들도 다 믿음을 이야기하는데, 왜 그들의 믿음은 안된다는 것인가? 하나님께서 믿음의 근거를 주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말씀입니다. 말씀이 아닌 아무런 근거도 없이 믿는다면 그것을 “맹신”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이단이나 미신은 물론이고, 많은 성도가 “맹신의 믿음”으로 삽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지 않는 믿음은 귀로 듣거나 눈으로 보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3절에서 히브리 기자는 “믿음으로 우리는 세상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졌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보이는 것은 나타나 있는 것에서 된 것이 아닙니다.” 믿음이 선배들이 결코 눈에 보이는 것에, 믿음의 근거를 두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를 두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암송하고, 삶 공부를 통해 더욱 믿음의 근거를 만들고, 그 근거 위에 믿음을 쌓아가고, 믿음의 깊이를 더해 가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