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16.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받음으로 연결되고 결합되어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
산토끼와 죽은 토끼를 외형으로만 비교한다면 크게 다를 것이 없습니다. 눈도 귀도 내장의 구조도 같습니다. 하지만 토끼의 몸이 유기적이며, 조화를 이루어서 하나가 되는지를 보면 산 것과 죽은 것에는 커다란 차이가 생깁니다. 살아 있는 토끼의 몸에는 혈관을 따라 피가 돌고 신경이 서로 연락하고 조화를 이루어 하나가 되고 주변에 반응합니다. 이것을 ‘생명현상’이라고 합니다.
의사 누가는 사도행전 20:28에서 바울의 말을 빌려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보살피게 하셨느니라.” 했습니다. 교회란? 건물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음으로 거룩하게 된 무리”를 일컫는 말이기에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라는 말이 이해가 됩니다. 그래서 교회는 하나님께 당신의 생명처럼 귀합니다. 바울은 아예 주님의 몸이라고 했고, 몸인 교회의 머리라고 했습니다. 머리와 몸이 서로 떨어질 수 없습니다. 각각으로 생각할 수도 없습니다. 하나입니다.
바울은 여러 번 교회를 건물과 사람의 몸에 비유했습니다.창문 하나, 문짝 하나를 일컬어 집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문도 있고 창문도 있고, 지붕, 벽체 모든 것을 갖출 때 집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곳에 가족이 머물면 가정이 됩니다. 사람의 몸도 마찬가지입니다. 눈을 우리 몸에 보배라고 하지만 눈 하나를 몸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지체라고 합니다. 수많은 지체들이 모여 하나가 되고, 각 지체에 피가 돌고, 신경조직으로 연결되어 다른 지체가 아프면 함께 울고, 아파하며, 기쁠 때는 함께 기뻐하고 즐거워합니다. 이것을 몸이라고 하고, 살아 있다고 합니다.
“두 제자가(침례요한의 제자라는 뜻) 그의 말을 듣고 예수를 따르거늘 예수께서 돌이켜 그 따르는 것을 보시고 물어 이르시되 무엇을 구하느냐 이르되 랍비여 어디 계시오니이까 하니 (랍비는 번역하면 선생이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와서 보라 그러므로 그들이 가서 계신 데를 보고 그 날 함께 거하니 때가 열 시쯤 되었더라.”(요 1:37-39)
침례요한의 두 제자가 자신의 스승으로부터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시라는 말을 듣고는 예수님을 만나 대뜸 어디 계시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주님은 ‘와서 보라’고 하셨습니다. 동양적 사고에서 스승과 제자는 지식을 주고받는 것보다 스승과 제자와의 관계를 더 중요하게 여깁니다. 그래서 스승은 제자가 믿은 만 하다고 생각될 때 비로소 자신이 갖고 있는 모든 것을 제자에게 주기 시작합니다. 그것은 제자의 입장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일정기간 스승과 제자는 동고동락을 하게 됩니다. 인격적인 관계를 통해 스승의 삶 전체를 얻기 위함입니다.
두 제자가 주님께 어디에 계시느냐고 물은 것은 예수님의 실제적인 삶을 통해 정말 그리스도인지 확인하고 싶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 역시 와서 보라고 하신 것은 당신의 삶의 현장을 보고 판단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살아 있는 몸은 반드시 유기적인 관계가 있습니다. 지체 각각의 고유의 역할은 있지만 결코 홀로 움직이는 법이 없습니다. 피와 신경을 통해 같은 생명을 공유하고, 유기적인 관계를 통해 자신의 역할을 감당합니다. 살아 있는 성도는 반드시 주님의 몸인 교회의 지체여야 합니다. 그리고 각 지체와 유기적인 관계 속에 기쁨과 슬픔을 함께 나누며 살아야 하고, 몸 된 교회의 머리이신 예수님의 생명을 공유함으로 하나가 되고, 예수님과의 바른 관계를 통해 다른 지체인 성도들과도 서로 사랑하고 섬기며, 하나가 됩니다. 하나님은 교회공동체가 아닌 각 개인을 통해 역사하시거나 일하시지 않습니다. 한 사람이 구원받았다는 사실을 무엇으로 확인하겠습니까? 신앙고백인가요? 삶의 변화인가요? 침례를 받고도 얼마 후 신앙을 저버리는 사람이 많습니다. 확실하게 교회공동체 안에 생의 뿌리를 박고 사는 사람입니다. -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