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약의 유대인들은 물질적인 부유함이 하나님께서 주신 축복이라고 생각했습니다.그래서 부자는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만큼 믿음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물론 아브라함이나 이삭, 야곱처럼 좋은 믿음의 있습니다. 그래서 부자 청년이 그토록 당당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오히려 반대로 말씀하셨습니다.“내가 다시 너희에게 말한다. 부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지나가는 것이 더 쉽다(마 19:24)." 왜 이런 말씀을 하셨을 까요? 신앙은 사람 중심의 삶을 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지난주 본문(행 4장)에서 예루살렘 성도들은 자신들의 재산을 처분해서 사도들의 발 앞에 놓았다고 했습니다. 돈을 발 밑에 두었다는 것은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예루살렘 성도들에게 돈은 발밑에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돈이 사람 위에 있으면 우상입니다. 부자 청년이 돈 때문에 근심하며 간 것은 그에게 돈이 우상이라는 의미입니다.
마 19장에서 부자 청년의 이야기가 기록되고, 이어서 20장에서 포도원 비유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 을 얼마나 귀하게 여기시는지 알려주시기 위함입니다. 포도원 주인은 이른 새벽부터 오전 9시, 오후 3시, 그리고 오후 5시에도 일거리를 찾지 못하고 빈둥거리는 품꾼을 포도원에 넣었습니다. 하루의 일과가 끝나고, 품삯을 주는데, 이른 새벽부터 오후 5시까지 똑같이 한 데나리온의 품값을 주었습니다. 그러자 이른 새벽부터 하루 종일 일한 일꾼의 입에서 불평이 터져 나왔습니다. 어떻게 한 시간 일한 사람하고, 하루 종일 일한 사람하고 똑같냐는 것입니다. 그러자 주인이 당신과 나 사이에 한 데나리온으로 계약을 맺었는데, 내가 무슨 잘못인가? 내 돈으로 내가 선한 일을 하는데, 무슨 참견인가?
여기에서 사람 중심인가 돈 중심인가! 차이가 납니다. 왜냐하면 고대 사회에서는 하루 벌어 하루를 사는 시대입니다. 한 시간 일했다고 한 시간만큼의 품값을 주면 가족들은 먹을 것이 없습니다. 포도원 주인은 일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사람이 중요했던 것입니다. 일하지 못하면 굶을 것을 알기에 오후 5시에도 사람을 포도원에 들여 보낸 것이고, 똑같이 하루의 품삯을 준 것입니다. 16.“이와 같이 꼴찌들이 첫째가 되고, 첫째들이 꼴찌가 될 것이다." - 너는 세상에서는 일등일지 몰라도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꼴등이야!
* 수요설교의 주제로 게으름이란 주제를 끝내고 ‘새로운 삶’이란 주제를 시작하면서여러분에게 했던 세 가지 질문이 생각나실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그 질문과 관련된 말씀들을 몇 주에 걸쳐 나눴기 때문에 오늘은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첫 질문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믿음이 자란다는 것’, 즉 성숙해져 간다는 의미가 무엇이냐? - 그것은 내 주변에 사람들이 보이는 것입니다. 평상시 같았으면 상종하기 싫은 사람일 수도 있고, 그리 만날 일이 없을 것, 같은 사람인데, 관심이 생기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만나는 사람은 늘 뻔한 사람들입니다. 가족, 교회 식구, 목장 가족, 그런데 바울의 표현으로 헬라인인 내가 야만인, 어리석은 사람에게 관심이 생기는 것입니다. 야만인은 주변에 사람이 없습니다. 어리석은 사람도 그렇습니다. 주님은 이런 사람들을 병든 사람이라고 표현하셨습니다. 그러면서 병든 사람에게 의사가 필요하지 건강한 사람에게 무슨 의사가 필요한가? 하셨습니다. 주님은 그런 사람을 위해 오셨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런 사람들과 어울리시고, 놀아주셨습니다.
두 번째 질문, 지금 여기 앉아 있는 사람 중 가장 으뜸인 사람이 누구일까? 첫 번째 질문에 답을 했다면 두 번째 질문에 대한 답은 너무 쉽습니다. 하나님의 눈에는 그 사람의 환경이나 배경이나 무엇을 가졌는지. 이런 것들에 관심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 모두가 구원받고, 이 세상 모두가 천국 시민권자가 되는 것이기에 하나님의 눈에 가장 귀한 사람은 영혼 구원을 위해 사는 사람입니다.
세 번째 질문, 그리스도인에게 어떤 말년이 가장 아름답고, 행복한 것일까? 했습니다. - 바울이 그것을 잘 보여주셨습니다. 바울의 말련 2년간 로마에서 셋집에 거하게 되었습니다. 감옥은 아니었지만 착고에 매인 채 군병들의 감시 속에 있었습니다. 하루 3교대로 바울을 감시하는 군병들에게는 물론 셋집을 찾는 많은 사람들에게 말씀을 전하거나 가르치거나 벗이 되어 주었습니다. 자신을 가옥에서 꺼내 달라고 구명 운동하지 않고, 주어진 환경에 감사하면서 하나님께서 만나게 해 주시고, 보내주신 사람들과 끝까지 하나님의 사랑을 나누며 살다가 형장의 이슬이 되었습니다. 말련을 바울처럼 사는 것이 행복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과 함께 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