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담을 통해 인간에게 죄가 들어왔고, 그 죄와 함께 굶주림, 질병, 죽음, 헐벗음 같은 악한 역사가 들어왔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 아닙니다. 창조의 계획에도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눈은 가난하고, 연약하며, 어려운 처지에 빠진 이들을 향하여 계십니다. 이런 이들을 얼마나 불쌍히 여기시고, 안타깝게 여기시는지 (마 25:34-40) “34. 그 때에 임금은 자기 오른쪽에 있는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내 아버지께 복을 받은 사람들아, 와서, 창세 때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준비한 이 나라를 차지하여라. 40. 임금이 그들에게 말하기를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여기 내 형제자매 가운데,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다' 할 것이다.”
(고후 8:1-4) “1.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께서 마케도니아 여러 교회에 베풀어주신 은혜를 여러분에게 알리려고 합니다. 2. 그들은 큰 환난의 시련을 겪으면서도 기쁨이 넘치고, 극심한 가난에 쪼들리면서도 넉넉한 마음으로 남에게 베풀었습니다. 3. 내가 증언합니다. 그들은 힘이 닿는 대로 구제하였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힘에 지나도록 자원해서 하였습니다. 4. 그들은 성도들을 구제하는 특권에 동참하게 해 달라고, 우리에게 간절히 청하였습니다.”
- 예루살렘교회 뿐 아니라 신약교회 대부분은 복음을 전하는 교회의 존재 목적과 더불어 교회 안팎의 어려운 이들을 돕는 구제 사역을 당연한 사역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왜냐하면 구약시대에도 구제는 하나님의 관심 사역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십일조가 두 가지였습니다. 첫 십일조는 성전에 내는 십일조로 성전에 필요한 재정과 제사장들의 생활에 필요한 재정으로 충당되었고, 두 번째 십일조는 첫 십일조를 드리고 남은, 10분의 9에서 다시 10분의 1을 십일조로 드렸습니다. 이 십일조는 마을 공동체가 관리했습니다. 이 돈은 마을의 과부나 어려운 처지에 놓인 마을 사람들을 돕고, 두 번째는 가난한 여행객이나 재난을 만난 이들을 돕는 일에 사용되었습니다.
주님은 더욱더 구제를 강조하셨습니다.그래서 신약교회는 더욱 구제 사역이 중요했습니다. 하지만 사도들은 복음을 전하고 기도하는 사역과 구제하고 섬기는 사역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습니다. 둘 다 중요한 교회의 사역이지만 그렇다고 둘 다를 감당하기에는 한계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본문의 말씀처럼 역할 분담을 해야 할 일곱 명의 집사를 세우고 그들을 안수한 것입니다.
- 하지만 역할을 분담한다고 해서 칼로 무 자르듯 역할을 분명하게 한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사도들도 말씀 전하는 사역과 기도 사역에 집중하지만, 여전히 일상의 삶에서 가난한 이들과 힘들고 어려운 처지의 사람들을 돕고, 섬겼기 때문이고, 집사들도 구제와 섬김의 사역만을 한 것이, 아닙니다. 빌립, 스데반 집사 같은 경우를 보면 복음을 전하는 일에도 열정적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빌립집사는 사마리아 지역, 지금의 팔레스타인 가자지구에 해당하는 블레셋 땅까지 가서 복음을 전했고, 스데반 집사 같은 경우에는 복음을 전하다가 돌에 맞아 순교했습니다.
이 시대 우리에게도 선택과 집중이 필요하게 되었습니다.왜냐하면 신약교회들을 보면, 교회 안팎의 어려운 이웃을 돕는 사역은 여전했지만 빌립보교회, 마케도냐교회, 에베소 교회들을 보면 어려운 이웃교회를 돕거나 바울 같은 선교사들을 후원하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 그래서 저희 교회에서도구제보다는 어려운 교회나 선교사님들을 후원하는 섬김의 사역을 선택하고 집중하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교회의 규모나 재정 사항을 고려하면, 어떤 역할에 집중해야 할지 선택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간혹 우리 교회가 구제에 등한시하는 것이 아니냐? 하고 서운해 하는 분들이 있을 것 같습니다. 이는 우리 교회나 제가 구제가 중요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과거처럼 심각한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는 분들이 많지 않은 시대이기도 하고, 우리 교회가 모든 사역을 다 감당할 만큼의 여력이 없는 상태에서 선교 후원을 선택한 것이라고, 생각하면 될 것 같습니다. 그런 면에서 동부중앙교회의 제직들은 현재 교회 재정의 한계로 인해 감당하지 못하는 교회 안팎의 구제 사역에도 헌신해야 할 책임과 사명이 있을 것입니다. 예루살렘교회 제직들이 사도들이 감당할 수 없는 구제의 사역을 감당하는 한 축을 맡았듯이, 그러나 복음을 전하고 영혼을 구원하는 사역 또한 등한시하지 않았던 것처럼, 교회나 담임목사가 감당할 수 없는 한 축을 감당하고, 그러면서도 영혼 구원하여 제자 삼는 교회의 존재 목적에도 헌신하는 특권을 맡았습니다. 이래야 명실공히 담임목사의 조력자가 아닌 동역자가 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