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떻게 믿음으로 살며, 어떻게 신앙으로 살 것인가?결론은“사랑”하며 사는 것이라 했습니다. 지난주까지 세 가지를 나누었습니다. 간단히 말씀드리면,
첫째 사랑은 대상을 가리거나 따지지 않고 모두를 사랑하는 것이라 했습니다.- 아르니온(갖 태어난 양) 프로바티온(청, 소년기의 양), 그리고 프로바톤(성숙한 양)에 이르기까지
둘째는 먼저 찾아가는 것입니다. - 주님은 부활하신 후 먼저 제자들을 찾아가셨고, 이후 갈릴리까지 찾아가셨습니다. 죄인인 우리를 먼저 찾아와 구원의 선물을 주신 것도 하나님이셨습니다. 이렇듯 사랑은 먼저 찾아가는 것입니다.
셋째 사랑은 먼저 말을 거는 것입니다. - 사랑은 큰 것이 아닙니다. 먼저 말을 건네는 작은 행동에서 시작하는 것입니다. 죄를 짓고 두려움에 숨어 있는 아담 부부를 먼저 찾아와 주시고, 먼저 말을 건네심으로 구원이 시작되었습니다. 배신한 제자들을 먼저 찾아와 주시고 먼저 말을 건넴으로 인해 회복이 시작되었습니다.
넷째 사랑은 필요를 채워 주는 것입니다. : 밤이 새도록 한 마리의 물고기도 잡지 못한 제자들의 그물을 들 수 없을 만큼 가득히 고기로 채워 주셨습니다. 만약 아침 양식을 위한 것이라면 굳이 그렇게 많은 물고기를 잡을 이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성경에는 온유라는 단어가 많이 나옵니다. 예수님도 자신을 가리켜 “나는 마음이 온유하다.”(마 11;29) 하셨습니다. “마음이 온유한 자는 복이 있다.”(마5 :5)라고도 하셨습니다. 모세를 가리켜서는 온유가 지면에 승하다 했습니다. 그런데 온유라 는 단어는 잘 길 드려진 말을 의미하는 단어로서 성품이나 기질이 자신의 감정대로 쓰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쓰임 받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고린도전서 13장의 사랑의 장에서 바울이 “사랑은 온유하다.”할 때 온유는 그런 의미가 아니라 필요를 채워 준다는 의미의 그리스어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왜 온유라는 단어로 번역했는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바울의 의도는 사랑은 상대의 필요를 채우는 것이라는 의미였습니다.
예)선한 사마리아인 이야기의 주제:당장의 필요를 채워 주었다는 것입니다. 지금도 서울은 출퇴근 시간은 전쟁입니다. 만원버스에서 “그만 태우라.”라고 소리치는 사람이 누구겠습니까? 운전기사입니까? 아닙니다. 제일 늦게 탄 사람입니다. 왜요? 자신의 생명이 제일 귀하기 때문입니다. 다른 이야 출근이 늦든 말든, 추위에 떨든 말든!
독일 버스는 장애인이나 노인들이 타기에 쉽도록 최대한 문이 보도블록의 높이와 비슷하게 만들어져 있습니다. 하지만 차가 보도블록에 닿으면 안 되니까 10cm 높습니다. 그런데도 차가 정류장에 서면 그 10cm를 줄이기 위해 차가 보도 쪽으로 기울어집니다. 그렇게 차를 개량하려면 수천만 원이 듭니다. 차가 기울어지고 다시 원상회복하는데 몇 분의 시간이 흐릅니다. 우리는 상상을 못 할 일입니다. 선진국이란? 돈이 많은 것이 아니라 배려입니다. 상대의 생명과 내 생명이 같다는 인식입니다. 필요를 채운다는 말은 꼭 물질로만은 아닙니다. 배려, 웃음, 따듯한 말 한마디, 등등 많습니다.
다섯째 사랑은 예의를 갖추는 것입니다. : 요 13장의 최후의 만찬에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심, 12명의 발을 씻기 위해 겉옷을 벗으셨던 주님은 다시 옷을 입으시고 말씀하셨습니다. 비록 제자들 앞이지만 의관을 정제하신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님은 베드로의 이름을 세 번이나 부르셨습니다.그런데 세 번 모두 똑같이 “요한의 아들 시몬아”하셨습니다. 주님이 저를 부르실 때 연홍아! 하고 부르실 수 있지만 정연홍 목사! 하고 부른 것과 같습니다. 베드로야! 하시지 않고 요한의 아들 시몬아! 하신 것은 성이 없던 시절에 상당한 예를 갖추는 이스라엘의 전통이랍니다. 예배가 무엇입니까? ‘예를 갖추어드리는 경배’라는 뜻입니다. 고전13:5에서 바울은 ‘사랑은 무례히 행치 않는 것’이라 했습니다. 성도들끼리도 공식 석상에서는 서로 존대해 주고 서로의 공식적인 직책을 불러주십시오. 하나님께는 물론 사람에게도 사랑은 무례히 행치 않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