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절-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 팔레스타인의 목자와 양들은 4, 5월의 무더위를 피하고, 푸른 풀을 뜯기 위해 원하든 원치 않던 높은 산으로 올라가야 하고,그 길에는 반드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거쳐 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궁극적인 고향이며, 영원한 집인 하나님의 나라에 이르려면 반드시 죽음이라는 골짜기를 건너야 합니다. 그런데 여기까지는 누구나 이해하고 인정합니다. 그런데, 병으로든지, 사고라든지 하는 보통의 사람들이 겪지 않는 방법으로 죽음을 맞이하는 것에는 단지 헤어진다는 슬픔뿐 아니라 분노가 깔려 있습니다. 태중의 아이의 죽음, 어린아이, 젊은이의 죽음 앞에서는 더욱 그렇습니다. 그 분노는 ‘왜?’라고 하는 단어에 잘 묻어납니다. 그리고 그 ‘분노와 왜?’라는 질문은 분명 하나님께 대한 것일 것입니다. 그리고 아무도 그 질문에 답할 수 없습니다. 이런 경우를 만나면 직접적으로 묻지는 않지만 눈으로 압니다. “목사님은 아시나요?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는지?” 저에게묻고 있음을, 하지만 저는 대답해 줄 수 없습니다. 저도 모르니까요? 오직 이일을 행하시거나 동의하신 하나님만이 아실 것이고, 이면에 감추어진 이유를 알고 계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아주 기본적인 핵심진리는 분명합니다.“여호와여 내 젊은 시절의 죄와 허물을 기억하지 마시고 주의 인자하심을 따라 주께서 나를 기억하시되 주의 선하심으로 하옵소서. 여호와는 선하시고 정직하시니 그러므로 그의 도로 죄인들을 교훈하시리로다.”(시 25:7-8) 시편 25편은 다윗의 시입니다. 다윗은 보통사람들이 겪을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선 고난과 고통, 그리고 심지어 자녀들의 죽음을 경험했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여호와는 선하시고, 정직하시다.”라고 고백합니다. 다윗은 모든 상황과 갑작스러운 죽음에 대해 그 이유를 알았을까요? 아닙니다. 다윗인들 어떻게 알았겠습니까? 다윗도 다 이해한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하나님은 선하시고, 정직하다.”는 것입니다.” 다윗은 이것에 대한 분명한 확신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묻습니다. 삶을 다 살아보지도 못한 아이의 죽음이 어떻게 선한 것입니까? 혹은 예수님을 알지도 못한 채 죽었는데, 이것이 어떻게 선한 것입니까? 맞습니다. 그런 질문이 당연합니다. 하지만 정작 죽은 그 아이도 그렇게 생각할까요? 하나님 나라의 그 행복과 영원한 생명과 놀라운 하나님의 영광 앞에서 과연 죽음을 슬프다고 할까요? 저는 장담합니다. 100% 아닐 것입니다. 또 예수도 안 믿고 죽었다고 누가 장담할 수 있나요? 주님의 십자가가 한편 강도도 죽음 직전에야 주님을 만났고, 하나님 나라에 임했습니다. 길게 짧게 죽었다는 말은 우리의 시간표입니다. 우리의 시간은 태평양 바다에 물 방울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다 받아드렸습니다. 이해할 수 없는 죽음마저 하나님의 선하심과 정직하심을 믿고 받아드린 다면, 이 세상의 그 어떤 죽음의 골짜기 같은 고통과 어려움도 다 믿음으로 받아드리고,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을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