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바울이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만났을 때,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히여 나를 박해하느냐 하시거늘 대답하여, 주여 누구시니까? 이르시되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행 9:4-5) 바울이 깨달았습니다. 예수님은 성도들의 박해를 당신의 박해로 동일시하신다는 것을, 그래서 이 땅의 사람들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이 어떠한지를 깨달았습니다. 다른 유대인들처럼 바울도 유대인으로서 하나님이 유대만의 하나님인 줄 알고 살아왔습니다. 하지만 주님을 만나고 깨달았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이들의 하나님이시다. 그래서 바울은 평생 “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내가 빚진 자라.”라고 한 것입니다.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 사랑이며, 사람을 미워하는 것은, 하나님을 미워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 오늘 본문에 부자 청년이 있습니다. 고대사회에서 청년은 자신의 힘으로 부자가 될 수 없습니다. 지금처럼 주식 투자나 복권이나 부동산 투자 이런 것이 없는 목축업이나 농경사회입니다. 평생 애를 써도 부자가 되기 쉽지 않습니다. 농경이나 목축은 대를 이어 조금씩 부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청년은 자신의 힘으로 부자가 된 것이 아니라 부모에게서 유산을 받은 것입니다.
- 이 청년이 예수님께 왔습니다. 그리고 질문을 합니다. “내가 영생을 얻으려면 무슨 선한 일을 해야 합니까?”사실 이 청년은 자신의 부와 믿음을 자랑하고 싶은 것입니다. 자신이 지옥 가리라고 생각해서 한 질문이 아닙니다. 이것을 아시기에 주님은 계명을 지켜라(17절). 하셨습니다. 그러자 청년은 무슨 계명을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십계명 중 사람과의 관계에 관한6-10까지의 계명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여섯 가지 계명의 핵심이 바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러자 청년은 자신 있게 “그러한 계명들은 내가 다 지키고 있습니다. 아직도 뭐가 부족합니까?”
맞습니다. 이 청년은 외형적으로는 여섯 가지 계명들을 다 지키고 있습니다. 그래서 자신만만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전혀 엉뚱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고 하면, 가서 네 소유를 팔아서, 가난한 사람에게 주어라. 그리하면, 네가 하늘에서 보화를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21절)."
- 이게 무슨 의미일까요? “네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고 있느냐?” 하고 물으신 것입니다. 자신이 애써서 번 돈도 아니고, 부모의 유산으로 큰 부자가 되었으면서 너는 이웃의 가난과 고통과 어려움을 위해 네 물질이 쓰이고 있니? 하고 물으신 것입니다. 이웃의 어려움이나 가난보다 자신의 물질을 더 소중하게 여기면서 과연 네가 이웃을 사랑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가? 그렇다면 네가 이웃을 사랑하고 있다는 증명을 해 봐라! 하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자 이 청년은 근심하며 떠났다고 했습니다.
- 하나님께서 우리를 목사로, 목자로 목녀로 집사로 부르셨습니다. 무엇을 위해서요? 사람을 사랑하고, 구원하라고 부르신 것입니다. 그런데 왜 이것이 안 될까요? 이 청년처럼 사람보다 더 사랑하고 아끼는 것이 있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