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 박윤선 목사님(성경주석학자)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내가 이렇게 힘써온 이유는, ‘내일’이란 시간을 내 것이라고 보장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내일’이라는 시간은 하나님의 것이다. 따라서 오늘이 내 인생의 마지막 날이라고 생각하고 최선을 다하여 나의 일을 하려고 노력해 보기도 하였다.”
- 막 1:35에서 예수님의 하루의 삶에 대해,“새벽 아직도 밝기 전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시더니” 했습니다.열심히 사는 것과 게으름에는 ‘잠’이라는 것이 개입되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도 “게으름이 사람으로 깊이 잠들게 하나니 태만한 사람은 주릴 것이니라.”(잠 19;15) 했습니다. “태만한 사람”이란?‘집중력이 결여된 사람’이란 의미입니다. 게으름은 지나치게 잠들게 하고, 지나친 잠은 집중력을 떨어뜨려서 열심히 사는 것을 방해하기 때문입니다.
믿음으로 살고자 했던 많은 분들의 공통점은 잠과의 싸움이 있었습니다.게으름은 인간의 본성 같은 것이기에 잠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른 새벽부터 늦은 밤까지 계속되었을 예수님의 사역이 예수님의 힘이 남아돌아서, 예수님이 잠이 없으셔서 이겠습니까?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폭풍이 이는 갈릴리 바다 위 배, 고물에서 그렇게 곤히 잠이 드실 수 있겠습니까? 아닙니다. 피곤치 않아서가 아니라 더 많은 사역과 하나님과의 교제를 위해, 잠을 줄이신 것입니다. 물론 고려될 사항이 있습니다. 너무 피곤할 때는 평상시 보다 좀더 자는 것이 피로 회복에 도움이 됩니다. 하지만 기력이 쇠하거나 뭔가 병이 있을 때는 오히려 많은 잠이 더 많은 기력을 빼앗아 가기도 합니다. 그래서 피곤의 문제인지, 치료가 필요한 질병의 문제인지 분별하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어쨌든 성도는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과하지 않게 자는 싸움이 있어야 합니다. 때로는 기도와 사역을 위해 30, 1시간 잠을 줄이는 결단도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선한 삶의 목표가 있기 때문입니다(엡 2:10). 하나님은 이 세상을 구원하고, 회복하는 일을 위하여 먼저 우리를 부르시고, 하나님과 함께 이 일을 이루자고 하는 삶의 목표를 주셨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우리를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 세우셨습니다. 세탁소를 운영한다면, 다른 집보다 더 깨끗하게 세탁해야 하고, 슈퍼마켓을 운영한다면 더 싱싱하고, 저렴한 물건을, 부동산업자라면, 정확하고, 양심적이어야 합니다. 공장을 운영한다면, 그 물건이 하자가 없도록 틀림없다는 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그러려면 게으를 수가 없습니다. 더 자고, 더 놀고, 더 많은 이익을 추구하면서 그렇게 되는 것은 불가눙하기 때문입니다.
초대교회 시절 철학자요, 사상가인‘성. 아우구스티누스’는 로마제국의 멸망을 다르게 해석했습니다. “기독교가 승리함으로 무너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삶의 방식을 실천하지 못했기 때문에 허물어졌다.”고 했습니다. 누구든지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선한 삶의 방식이나 삶의 목표에서 벗어난다면 스스로 무너진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성도도, 교회도 예외일 수 없는 것입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늘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명하신 바를 주소서, 원하시는 바를 명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