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 절대 놓쳐서는 안 되는 것들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사단의 속임수와 심적 교란입니다. - 모든 전쟁에는 패배가 됐든 승리가 됐든 반드시 수많은 희생과 피와 사상자가발생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단은 교묘하게 우리가 영적전쟁을 통해 치르게 되는 손해와 희생과 피 흘림에 대해, 마치 패배의 결과인 것처럼 우리 마음을 교란시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실상은 사단이 패하고 사단의 나라가 패망한 것인데도 마치 우리가 패망해서 만나는 결과인 것처럼 우리로 심히 침체에 빠지게 하고, 계속되어야 하는 하나님의 사역을 멈추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본문11절의 말씀을 보면, 잠시이기는 하지만 바울이 피하고 싶고 도망치고 싶을 만큼 힘들었던 고린도를 떠나지 않고 오히려 1년 6개월간 머물러 말씀을 가르쳤다고 했습니다. 무엇이 사울의 마음을 바꾸고 걸음을 멈추게 했을까요?
첫째는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도 힘이 솟는 동역자 실라와 디모데의 고린도에의 합류였습니다.
5절을 보면 “실라와 디모데가 마게도냐로부터 내려오매 바울이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 유대인들에게 예수는 그리스도라 밝히 증언하니” -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도 기쁠 것 같은 실라와 디모데가 마게도냐로부터 내려와 고린도전도에 합류한 것은 침체된 바울의 마음에 커다란 힘과 의지가 된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들은 바울의 가장 힘든 여정 가운데 생사고락을 함께해온 동역자들이었기 때문입니다. 많은 성도들의 착각 중 하나가 담임목사님은 침체가 없는 줄 압니다. 아닙니다. 마음으로 피눈물을 흘리며 참을 때가 많습니다. 리더가 흔들리는 모습을 보이면 성도들이 흔들릴까 봐 보여주지 않는 것뿐입니다. 여러분은 목사님과 목자님들에게 얼굴만 봐도 힘이 나고 기쁨이 되는 사람이 되십시오. 이것 또한 영혼 구원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마게도냐의 성도들의 성숙을 넘는 헌신 때문이었습니다.
사도행전 본문에는 기록되지 않았지만고후 11:9의 말씀을 보면, 실라와 디모데가 마게도냐 지역에서 고린도에 있는 바울과 합류하기 위해 마게도냐를 떠날 때 재정적인 어려움을 겪고 있는 바울을 위해 선교헌금을 모아 전해준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 비용이 부족하였으되 아무에게도 누를 끼치지 아니하였음은 마게도냐에서 온 형제들이 나의 부족한 것을 보충하였음이라 내가 모든 일에 너희에게 폐를 끼치지 않기 위하여 스스로 조심하였고 또 조심하리라.” 마게도냐의 성도들은 주님을 만난 지 몇 개월도 채 되지 않은 초신자들이었습니다. 날마다 유대인들로 인해 핍박받는 처지에 있었고, 극한 가난에 처해 있었다고 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신앙을 지키고 있다는 소식만으로도 큰 힘이 될법한데 저들은 힘에 지나는 섬김의 삶을 결단한 것입니다. 말씀의 씨앗은 반드시 열매를 맺습니다.
세 번째는 주님의 위로와 격려였습니다.
오늘 본문 9-10절입니다. “밤에 주께서 환상 가운데 바울에게 말씀하시되 두려워하지 말며 침묵하지 말고 말하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어떤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니 이는 이성중에게 내 백성이 많음이라 하시더라.” - 우상의 도시, 공적인 창녀만도 1,000명이 있을 만큼 타락한 도시, 그리고 시도 때도 없이 바울을 괴롭게 하는 유대인들의 핍박과 방해로 인해 모든 것을 포기하고 떠나고 싶었던 바울에게 주님이 찾아오셨습니다. 두려워하지 말라고, 그리고 침묵하지 말고 계속 말하라고 격려해 주셨습니다. 만왕의 왕, 능력의 왕이신 주님께서 친히 함께하실 것이기에 아무도 너를 해롭게 할 자가 없다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바울의 걸음을 멈추게 한 진짜 결정적인 말씀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이는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 하시더라.”이었습니다. - 이 말씀의 의미는 네가 만약 지금 고린도를 포기하고 떠난다면, 너를 통해 구원하려던 고린도의 저 수 많은 영혼은 어떻게 될까? 하는 질문이었습니다.
가정교회라고 늘 즐겁고 행복한가요? 아닙니다. 지치고, 힘들고, 포기하고 싶을 만큼 괴로울 때도 많습니다. 그런데 일어서야 합니다, 포기하지 않고 또 가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포기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부탁하신 저 영혼들은 누가 책임지며, 구원하겠습니까?
신앙은 전쟁입니다. 그리고 가정교회 성도들은 이 영적 전쟁터의 특공대로 부름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특공대는 늘 죽음 앞에 서 있습니다. 그래서 특공대는 상처와 피 흘림 정도는 당연한 듯 여깁니다. 물러서면 특공대가 아닙니다. 상처가 무섭고, 피 흘림이 무서우면 특공대가 아닙니다. 세상에 피 흘림이 없는 전쟁터는 없습니다. 이기든 지든 사상자가 있습니다. 하물며 전쟁터의 맨 앞에 서야 하는 특공대에 어찌 아픔과 고통과 피 흘림이 없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