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주 말씀 - * 눅 18장: 주님은 하나님도 그 누구도 두려워하지 않는불의한 재판관을 끊임없이 만나고 사정해서 마침내 원한을 푼 가난한 과부의 이야기를 말씀하시면서 이렇게 결론을 지으셨습니다.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그들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눅 18:7)
사실은 오해가 될 수 있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마지못해서 자비를 베푸시고, 우리는 과부처럼 들어 주실 때까지 끈질기게 하나님을 성가시게 해드려야 한다는 것일까? - 아닙니다. 이 비유의 말씀은 비교가 아니라 판사와 하나님, 불쌍한 과부와 우리를 대조해서 말씀해 주시는 것입니다.
판사는 하도 성가시게 하니 어쩔 수 없어서 과부의 원한을 풀어 주었지만 하나님은 그런 분이 아니시며, 우리는 힘도 없고 백도 없어서 어쩔 수 없는 방법을 선택했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더냐! 그래서 주님은 “하물며”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어쩔 수 없어 만나주는 판사가 아니라 오히려 기다려 주시는 분이시며, 언제든 만나실 수 있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기도하기를 기뻐하시고, 언제든 응답해 주실 준비가 되어 있으신 분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러하기에 바울은 오늘 분문 6절에서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고 합니다.
-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 응답에 대한 염려, 삶의 문제에 대한 염려대신 기도를 선택하라는 것, “모든 일에”- 하나님 앞에 기도하지 못할 제목이 없다는 의미입니다. “기도와 간구로”- 기도는 경배와 찬양이 들어 있는 일반적인 기도이고, 간구는 요구하지 말고 정중히 그리고 겸손이 요청 리라는 의미입니다. “너희 구할 것을” - 애매하고 뭉뚱거리는 그런 기도 말고 분명하고 정확하게, 구체적으로 필요를 요청드리라는 것입니다. “감사함으로”-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를 믿으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맹인에게 네게 무엇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친구에게 떡을 구할 때 분명하게 떡 세 덩이를 했습니다. 어머니 마리아는 주님께 단순히 도와 달라고 하시지 않고 분명하게 포도주가 떨어졌다 했습니다.
* 오늘은 구체적인 기도가 왜 중요한가에 대해 나누려 합니다.
1. 구체적인 기도는 진지합니다. - 만약 누군가 “언제 한 번 찾아뵈겠습니다.”한다면 그렇게 신경 쓰이지 않습니다. 언제 한 번 밥 한번 먹읍시다와 같이 상투적인 말일 가능성이 많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번 주 금요일 5시에 찾아뵙겠습니다. 아주 중요한 일을 상의 드리려 합니다.” 이러면 상황이 달라집니다. 구체적으로 기도할 때 하나님은 우리가 진지하구나! 이렇게 생각하살 것이기 때문입니다.
2. 구체적으로 기도할 대 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위해 혹은 나를 위해 일하심을 목격할 기회가 됩니다.- 창 24장 12-14절: 아브라함의 청지기 엘리에셀의 기도입니다. 그런데 15절에 말을(기도를) 마치기도 전에 리브가가 물동이를 어깨에 메고 나왔습니다.
3. 구체적인 기도는 짐을 가볍게 합니다. - “주님 내일 회의를 도와주세요.” 하는 것과 “주님 내일 직장 상사인 과장님과 회의를 합니다. 저는 그분이 무섭습니다. 오늘 밤 평안히 자게 해 주시고, 준비된 상태로 회의에 참여해서 상사의 친창을 받고 인정받게 해 주세요.” 하는 것은 다릅니다. 구체적으로 기도하면 하나님의 역사가 기대가 되고 그러면 당연히 무거운 짐이 가벼워집니다.
물론 기도의 내용이 많으면 좋다는 말이 아닙니다. 간구란? 진지하게, 그리고 겸손이 요청 드리는 것이지 요구가 아니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구체적인 기도는 하나님께 대한 기대와 신뢰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사 62:6에서“예루살렘아, 내가 너의 성벽 위에 파수꾼들을 세웠다. 그들은 밤이나 낮이나 늘 잠잠하지 않을 것이다. 주님께서 하신 약속을 늘 주님께 상기시켜 드려야 할 너희는, 가만히 있어서는 안 된다. 늘 상기시켜 드려야 한다.” 했습니다. 여기서 파수꾼이란? 기도하는 성도를 일컫는 말입니다.
“온갖 기도와 간구로 언제나 성령 안에서 기도하십시오. 이것을 위하여 늘 깨어서 끝까지 참으면서 모든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십시오.”(엡 6: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