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요설교의 주제로 게으름이란 주제를 끝내고 ‘새로운 삶’이란 주제를 시작하면서여러분에게 했던 세 가지 질문이 생각나실지 모르겠습니다.
첫 질문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믿음이 자란다는 것’, 즉 성숙해져 간다는 의미가 무엇이냐? - 그것은 내 주변에 사람들이 보이는 것입니다. 평상시 같았으면 상종하기 싫은 사람일 수도 있고, 그리 만날 일이 없을 것, 같은 사람인데, 관심이 생기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만나는 사람은 늘 뻔한 사람들입니다. 가족, 교회 식구, 목장 가족, 그런데 바울의 표현으로 헬라인인 내가 야만인, 어리석은 사람에게 관심이 생기는 것입니다. 야만인은 주변에 사람이 없습니다. 어리석은 사람도 그렇습니다. 주님은 이런 사람들을 병든 사람이라고 표현하셨습니다. 그러면서 병든 사람에게 의사가 필요하지 건강한 사람에게 무슨 의사가 필요한가? 하셨습니다. 주님은 그런 사람을 위해 오셨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런 사람들과 어울리시고, 놀아주셨습니다.
두 번째 질문, 지금 여기 앉아 있는 사람 중 가장 으뜸인 사람이 누구일까? 첫 번째 질문에 답을 했다면 두 번째 질문에 대한 답은 너무 쉽습니다. 하나님의 눈에는 그 사람의 환경이나 배경이나 무엇을 가졌는지. 이런 것들에 관심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 모두가 구원받고, 이 세상 모두가 천국 시민권자가 되는 것이기에 하나님의 눈에 가장 귀한 사람은 영혼 구원을 위해 사는 사람입니다.
세 번째 질문, 그리스도인에게 어떤 말년이 가장 아름답고, 행복한 것일까? 했습니다. - 바울이 그것을 잘 보여주셨습니다. 바울의 말련 2년간 로마에서 셋집에 거하게 되었습니다. 감옥은 아니었지만 착고에 매인 채 군병들의 감시 속에 있었습니다. 하루 3교대로 바울을 감시하는 군병들에게는 물론 셋집을 찾는 많은 사람들에게 말씀을 전하거나 가르치거나 벗이 되어 주었습니다. 자신을 가옥에서 꺼내 달라고 구명 운동하지 않고, 주어진 환경에 감사하면서 하나님께서 만나게 해 주시고, 보내주신 사람들과 끝까지 하나님의 사랑을 나누며 살다가 형장의 이슬이 되었습니다.
* 본문은 바울이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만난 이야기가 담겨 있습니다. - 이후 바울은 하나님께서 왜 자신 같은 인간을 구원해 주시고, 사도로 부르셨는지를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엡 1:4-5에서 “4.하나님은 세상 창조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시고 사랑해 주셔서,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고 흠이 없는 사람이 되게 하셨습니다. 5.하나님은 하 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시기로 예정하신 것입니다.” - 하지만 이 고백 속에 왜 바울을 구원해 주셨는지 답이 들어 있지는 않습니다. 다만 태초부터 결정하시고 선택하신 하나님의 사랑과 경륜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모든 성도에게도 해당되는 이야기입니다. 지옥의 저주가 마땅한 우리가 구원받아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된 것이 하나님의 자비요, 신비로운 하나님의 경륜 말고, 무엇으로 설명이 되겠습니까?
- 바울이 다메섹에서 주님을 만나던 그 시각, 시력이 상실되었습니다. 사실 이것도 설명하기가 어렵습니다. 다만 제 해석으로는 주님께서 이렇게 하신 것은, “네가 나를 만나기 전, 본 세상은 다 무효야! 너는 이제 새로운 눈으로 세상을 보고, 사람을 보고, 하나님을 봐야 해” - 이전까지 바울은 죄악 된 눈으로, 오염되고, 편견 된 눈으로 세상을 보고, 사람을 보았습니다. 그 눈으로 보니, 사람을 편견 되게 볼 수밖에 없습니다. 유대인과 이방인을 나누고, 같은 유대인일지라도 세리와 죄인으로 나누고, 예수 믿는 사람을 이 세상에서 없어져야 할 천하에 못 쓸 인간 취급을 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만나 새로운 눈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 눈으로 세상을 보니, 정작 죄인은 자신이었고, 그것도 용서받을 수 없는 죄인의 우두머리였습니다. 반면에 모든 사람들에게 바울은 빚을 졌다고 생각했습니다.
- 10절의 말씀을 보면, “그런데‘라는 접속부사로 시작합니다. 예수님을 만나기 전, 바울은 기세등등하게 사람들까지 대동하고, 다메섹의 성도들을 체포하기 위해 왔습니다. 하지만 이제 바울은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이 되어, 자신이 체포하려고 했던 ’아나니아‘라는 선지자의 기도를 통해 다시 앞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를 통해 침례를 받았습니다. 이후 바울이 어떻게 살았는지 여러분도 다 압니다.
“질그릇 가운데서도 작은 한 조각에 지나지 않으면서, 자기를 지은 이와 다투는 자에게는 화가 닥칠 것이다. 진흙이 토기장이에게 '너는 도대체 무엇을 만들고 있는 거냐?' 하고 말할 수 있겠으며, 네가 만든 것이 너에게 '그에게는 손이 있으나마나다!' 하고 말할 수 있겠느냐?(사 45:9)” 왜 이럴까요? 여전히 예전의 눈으로 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