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통령은 공무원들의 우두머리입니다(행 9:10-16). 그래서 공무원의 소명은 대통령의 부름을 받아 대통령이 시키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의 우두머리는 예수님입니다. 그래서 성도의 소명은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아 예수께서 시키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목사의 길이든, 선교사의 길이든, 아니면 공무원이든, 직장인이 되든. 예수님은 15절에서 아나니아에게 "가거라, 그는 내 이름을 이방 사람들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 가지고 갈, 내가 택한 내 그릇이다” 하셨습니다. 바울을 부르신 이유이고, 이것이 바울의 소명입니다.
- 그래서 바울에게는 자신만의 꿈이나 목표를 가지지 않았습니다. 철저하게 주님께서 지시하시는 길을 선택하고 순종하였습니다. 하지만 그 순종의 길은 지난하고, 고통스러웠습니다. 광야로 나가 3년간 기도하며, 주님과 깊은 교제 안으로 들어 갔지만 끝이 아닙니다. 고향 다소에서 13년간이나 칩거해야 했습니다. 주님을 알고 가슴이 뜨거워 미칠 것 같은데, 13년간이나 칩거라니요, 하지만 순종합니다. 그렇게 거의 16년의 시간이 흘러갑니다. 사람의 눈에는 너무 아깝고, 낭비된 시간이지만 바울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무엇이든 주님께 순종하는 것이 사명이며, 소명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러다가 겨우 1년간 안디옥에서 목회를 시작했는데, 선교지로 보내셨습니다. 말이 선교지, 거지 여행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1, 2, 3차에 걸쳐 선교여행을 했지만 단 한 번도 바울이 원하고 계획하는 대로 이루어진 적이 없습니다. 이렇게 막히고, 저렇게 막히고, 그러면 또 돌아가고, 그러다가 로마로 가는 꿈을 꾸었지만 정상적이지 않았습니다. 유대인들의 고발에 의해 재판을 받기 위해 로마로 갑니다.
* 3차 여행을 마치고, 예루살렘으로 귀환하며, 바울이 에베소교회 지도자들에게 마지막으로 남긴 유언과도 같은 말씀이행 20:22-24입니다.
22.보십시오. 이제 나는 성령에 매여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입니다. 거기서 무슨 일이 내게 닥칠지, 나는 모릅니다. 23. 다만 내가 아는 것은, 성령이 내게 일러주시는 것뿐인데, 어느 도시에서든지, 투옥과 환난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24.그러나 내가 나의 달려갈 길을 다 달리고,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다하기만 하면, 나는 내 목숨이 조금도 아깝지 않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방금 읽은 본문의 말씀이 행 20:22-24 말씀의 배경입니다.
- 에베소 교회에서의 약 3년간의 사역을 마지막으로 3차에 걸친 전도 여행이 끝이 납니다.바울은 예루살렘과 자신의 본거지인 안디옥교회를 방문하여 그간의 전도 여행의 결과에 대해 보고하고, 자신의 마지막 삶을 로마로 가서 전도함으로 끝을 맺으려는 계획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늘 상 그래왔던 것처럼, 이 계획마저 뒤죽박죽이 됩니다. 집요하게도 유대인들이 바울을 살해하려는 계획이 계속되었고, 이번에는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배 안에서 바울을 살해하려는 계획이 발견되었습니다. 거기에다 가는 곳마다 기도하는 분들이 예루살렘으로 가지 말라고 말립니다. 투옥과 환란이 기다린다는 것입니다.
- 그래서 바울은 주님과 뭔가 담판을 지어야 하겠다는 생각을 갖습니다. 도대체 가라는 말씀인가, 아니면 가지 말라는 말씀인가? 그래서 드로아에서 그동안 함께 했던 동역자들에게 먼저 배를 타고 앗소로 가면, 자신은 걸어서 앗소로 갈터이니 앗소에서 만나자고 합니다. 드로아에서 앗소 까지는 65km로 걸어서 사흘길입니다. 노쇠하고, 병든 바울이 동행자도 없이 걷는 다는 것은 너무 위험합니다. 하물며 유대인들의 살해 위협까지 있습니다. 동역자들과 의사 누가가 얼마나 말렸겠습니까? 아니면 자신들도 동행하겠다고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바울을 단호했고, 아예 명령을 내렸습니다. 앗소에서 만나자!
바울은 왜 이렇게 고집을 피우며, 위험한 길을 굳이 가려고 했을까요? 사흘간 걸으며, 주님과 깊은 교제와 기도를 드리기 위함입니다. 정말 주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 알고 싶고, 순종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들도 아닌, 성령님의 감동을 받은 기도의 사람들이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을 막기 때문입니다. 저 같으면 기도하는 분들이 아니라고 하니, 굳이 위험이 기다리고, 환란이 기다리고 있는 예루살렘으로 가지 않았을 것입니다. 변명과 이유가 분명하지 않습니까! 하지만 바울은 위험이나 환란이 문제가 아니라 주님의 참된 뜻이 무엇인지가 정말 중요했습니다. 주께서 바울을 선택하셨을 때, 선지자 아나니아는 ‘왜요?’라고 의문을 제기했지만, 주님의 선택과 결정은 한치도 틀림이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께 순종하면 한치도 틀릴 것이 없는 인생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