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가지 오해
막 10:17-22의 이야기입니다. 부자, 청년, 관원이라고 표현된 것으로 보아 그는 부자 청년 관원이었습니다. 이 정도면 다른 사람들에게 매우 부러움을 살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질문은, “선생님, 제가 어떻게 해야 영생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였습니다. 그런데 그가 예수님을 부르는 호칭은 ‘선생님’이었습니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알지 아니하고 ‘선생님’으로 알고 있으면, 영생을 얻을 수 없습니다. 지금도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사대성인 중의 한 사람, 그저 위대한 사람으로 알고 있습니다. 소크라테스의 “너 자신을 알라.”도 윤리를 가르치는 것이고, 공자의 ‘인의예지신’도 윤리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석가의 ‘팔정도’ 역시 바르게 살라는 교훈입니다. 모든 인간의 공통적인 문제인 죄의 문제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해결해 주지는 못합니다. 예수님만 십자가 죽음을 통해서 우리의 죄 문제를 해결해 주셨고, 부활을 통해서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해결해 주신 ‘주님’이십니다. 흔히 “아무거나 믿고 좋은 데 가야지.” 하는 사람은 아무 데나 갈 수밖에 없습니다.
두 번째 오해는, 무엇을 해야 영생을 얻을 것으로 생각한 것입니다. 처녀 때부터 예수님을 믿어서 여든여섯이 되신 노인이 있었습니다. 그분은 예수님을 잘 믿고 있었고, 성실하게 믿음의 삶을 살고 있는 분이었습니다. 그분에게 물었습니다. “어르신 예수님을 믿고 계십니까?” 그분이 대답하였습니다. “아무렴, 내가 지금 67년을 믿어 왔는데.” 다시 그분에게 물었습니다. “어르신, 죄송스러운 질문이지만, 지금이라도 세상을 떠나시면 천국에 가실 자신이 있으세요?” 어르신이 대답하셨습니다. “아직 멀었어.”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분명히 믿고 있으면서도 여전히 선한 일을 많이 하거나 인격을 갖추어야 영생을 얻고 천국에 갈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구원을 얻는 것은 행위로 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마음속에 구주로 영접하면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얻는다는 약속을 모르고, 구원의 확신이 없는 분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세 번째 오해는, 세상의 어떤 부귀영화보다도 영생을 얻는 것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부자 청년 관원에게 그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려주시기 위하여 몇 계명을 말씀하시자, 그는 “어려서부터 다 지켜 행하였다.”라고 당당하게 대답하였습니다. 매우 교만한 모습이었지만, 예수님은 이것을 지적하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그를 사랑하시며,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볼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청년 관원으로서 부자가 되려면, 부모로부터 유산을 많이 물려받았든지 탐욕으로 인하여 부정한 방법으로 재산을 축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아직 청년인 것으로 보아, 아마 후자였던 것으로 짐작이 됩니다. 이유는 “그것을 팔아서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라.”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는 영생을 얻는 것보다 재물에 대한 탐심으로 인하여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예수님을 떠나갔기 때문입니다.
-이경준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