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5:7 다섯 번째 ‘팔복’ - 긍휼(자비한)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
* 지난주 나눈 의에 대한 목마름 중 또 하나는 목마름은 ‘순종’이었습니다.
산상수훈의 마지막 장인7장에서 예수님은 순종에 대해 강조하셨습니다.- 마 7:24-27“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초를 반석 위에 놓은 연고요 나의 이 말을 듣고 행치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
왜 강조하셨을까요? -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하지만 성장은 순종과 행함에 있습니다. 인격과 신앙에 열매를 맺고 삶의 변화를 가져오는 것도 행함과 순종을 통해서입니다. 순종과 행함이 없는 믿음이 죽은 믿음이라는 야고보서의 말씀은 그런 의미입니다.
* 신문에 이러한 기사가 있었습니다.- 선천적 판막증이라는 심장병을 앓고 있는 고등학생이 있었습니다. 병 때문에 운동을 못했습니다. 키도 작고 힘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친구 다섯 명이 이 친구를 괴롭혔습니다. 원산폭격을 시키고, 연필을 손가락사이에 비틀고, 심지어 담뱃불로 몸을 지졌습니다. 견디다 못해 경찰에 신고해서 이들이 경찰 심문을 받게 되었는데 그 동기가 섬뜩했습니다. 친구가 아파서 소리를 질러 될 때마다 오히려 쾌감을 느꼈답니다.
- 예수님 당시에도 사람들이 별반 다르지 않았습니다.율법을 빌미로 사람 죽어 가는데 안식일이라는 이유로 치료해 주지 않았습니다. 부모에게 써야할 돈을 ‘고르반’이라하면 헌금으로 용도를 바꿀 수 있는 전통을 이용해 부모에게 쓸 돈으로 헌금을 하고 헌금으로 사용하려 했던 돈은 자신들을 위해 사용했습니다. 로마 사람들은 자기 자식이라도 마음에 들지 않으면 바다에 갖다 버렸습니다. 그렇기에 그런 시대적 상황을 보시며, 긍휼에 대해 말씀하신 것입니다.
요즘 긍휼이라는 단어는 사전에나 나와 있는 단어이지 일상생활에서는 거의 쓰지 않는 단어입니다. 의미는 ‘남을 불쌍히 여겨서 돕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긍휼은 훨씬 더 깊은 의미가 담겨있습니다. ‘사랑이 흘러넘쳐 주체하지 못하는 상태’입니다. 성경은 긍휼이란 단어 대신 여러 단어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인자, 자비, 사랑, 불쌍히 여김, 민망히 여김’등.
그런데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긍휼히 여기라는 말씀의 의미는‘동일시’ 여기라는 의미입니다. 심리학에서는 ‘감정이입’이라는 말도 합니다. 다시 말하면 처지를 바꾸어 생각하는 것입니다. 가장 완벽한 긍휼은 예수님의 ‘성육신’입니다. 창조주이시고,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인간으로 태어나 인간으로 33년간을 사셨고, 마침내 인간처럼 십자가에 죽으시고, 무덤에 묻히신 것입니다. 빌립보서는 ‘자기를 비우셨다’고 표현했습니다. 자비는 감정이입입니다. 상대의 어려움과 고통을 내 것으로 느낄 때, 자비가 가능하기 때문.
- 하지만 주님의 이 명령이 우리에게는 쉽지 않습니다. - 예수님께는 사랑이 흐르고 넘쳐서 주체하지 못하시지만 우리는 긍휼은커녕 부부간에도 악에 받쳐 싸우고 때로는 지칠 때까지 상대방을 비난하고 비방하고 도저히 수용할 수 없어서 헤어지기까지 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성경에 기록된 수많은 하나님의 명령들과 약속들은 우리가 지키기에 불가능한 것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고하고 왜 안 되거나 감당되지 않는 것들을 말씀하셨을까요?(예)마 22:34-40– 하나님 사랑, 이웃사랑) 이것을 붙들고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네 힘으로 하지 말고 하나님의 힘으로 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의 충만을 사모하고 간구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기도를 통해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가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