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가 성전은 아니지만
“예루살렘을 위하여 평안을 구하라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자는 형통하리로다.”(시 122:6)
이스라엘민족에게 예루살렘은 국가의 수도이며, 삶의 중심지이고, 신앙의 근거지였습니다. 다윗은 시122편에서 예루살렘을 위하여 평안을 구하라 했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자는 형통할 것이라. 했습니다. 이스라엘민족에게 예루살렘이 특별한 이유는 그곳에 하나님의 성전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의 평화는 성전의 평안과 직결되는 사항이었습니다. 예루살렘에 평안이 보장되지 않으면 이스라엘 민족은 성전에 갈 수도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도 드릴수가 없었습니다.
이스라엘민족에게 성전은 오직 예루살렘 성전 하나뿐이었습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안식일을 지키기 위해 하루나 이틀을 걸어야 성전에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그것조차 안 될 만큼 너무 먼 거리에 살 때에는 예루살렘성전을 향하여 창문을 열고, 엎드려 경배하였습니다.
오늘 날 성전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 정신마저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라.”(마 5:17) 하셨기 때문입니다. 물론 교회라는 개념도 건물을 의미하지 않고 주님께 대하여 신앙을 고백한 믿음의 사람들의 공동체를 일컫는 말입니다. 하지만 율법을 지킴으로 구원받는다거나, 여전히 예배당을 성전의 개념으로 여기는 율법주의는 배격되어야 하겠지만 율법주의를 배격한다고 율법의 정신마저 배격해서는 안 됩니다. 이스라엘민족이 예루살렘성전을 참으로 사랑하고, 성전을 삶의 중심에 두고 살았던 그 정신은 여전히 우리에게도 유효합니다.
예를 들면 오늘날 성도들은 교회를 정한 후 교회 가까이로 이사하는 것이 아니라 이사를 먼저 한 후 내 집과 가까운 교회가 어디인지 찾습니다. 만약 내 자녀가 서울대학에 붙었다면 집에서 멀다고 내 집과 가까운 대학으로 옳기겠습니까? 학교가 멀면 내 집이 이사하든지 그것도 안 되면, 하숙을 하든지 기숙사에 들어가든지 할 것입니다. 교회를 선택하는 것은 기도하며 신중히 결정해야 합니다. 하지만 일단 결정이 되면, 이스라엘민족의 마음에 하나의 성전만이 존재하듯, 평생 나의 교회는 하나만이 존재한다고 생각하고, 교회 중심의 삶을 사는 것이 옳습니다. 교회를 바꾸지 말고 집을 바꾸는 것이 옳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