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슴도치 같다.
아주 오래전 헨리 나우웬의 “상처 입은 치유자”라는 책에 대해 나눈 적이 있습니다. 이 책에서 나우웬은 주님이 “상처받은 치유자”이시라고 했습니다. 주님은 수많은 사람에게서 상처받으셨습니다. 무엇보다 가족이나 제자들에게서 받으신 상처는 더욱 쓰리고 아프셨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하지만 주님은 수많은 상처를 통해 친히 치유자가 되셨습니다.
이사야 53장은 인간을 “양 같은 존재”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 시대 사람들의 실존은 “고슴도치 같다.”입니다. 고슴도치는 외롭고 고독한 존재입니다. 왜냐하면 늘 홀로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고슴도치가 홀로인 이유는 결코 고독을 즐기는 존재이기 때문이 아니라 자기 몸에 난 가시 때문입니다. 많은 친구, 이웃과 함께하고 싶은데 가시 때문에 만나면 자신과 이웃이 상처를 입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을 만나보면 상처받은 사람은 너무 많은데 상처를 줬다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래서 하는 말이 “상처는 내가 받았는데 왜 지가가 아프다고 난리냐”는 식입니다. 고슴도치는 절대로 의도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누군가를 만나기만 하면 상처를 받습니다. 아마도 고슴도치는 자기 가시가 상대를 상처 나게 했다는 사실은 까마득히 모르고 자기 몸의 상처에서 흐르는 피만을 보고 “저놈을 상종하지 말아야지. 나는 저놈만 만나면 상처를 받는다.”라고 비난했을 것 같습니다.
인간이 살면서 겪게 되는 상처가 대략 3만 개쯤 된답니다. 하지만 이 말을 바꾸면 내가 사는 날 동안 이웃이나 가족에게 주는 상처가 그만큼쯤 된다고 보면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 또한 그럴 것입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은 달라야 합니다. 보편적인 사람들처럼 상처받고 상처를 주는 존재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주님처럼 “상처 입은 치료자(치유자)가 되어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자신이 먼저 받은 상처를 치유 받고, 상처의 경험과 치유의 경험을 통해 치유자가 되어야 합니다.
목장의 나눔의 시간은 자신이 치유를 받는 경험과 자신을 통해 누군가 목장 가족의 상처가 치유되는 경험과 상처를 솔직하게 고백하고 나눔으로서 성령님의 치유 되는 역사를 경험하게 됩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목장 가족들 앞에서 자신의 받은 상처를 진솔하게 고백하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듣는 목장 가족들은 진실과 마음을 다해 성령님의 치유하심을 구하는 간절한 기도를 해야 하고, 진실하게 함께 고통을 나누는 진지함이 필요합니다. 진실하게 고통을 나누는 방법은 진실하게 듣는 것부터 시작됩니다. 목자이든 목녀이든 신앙의 연륜이 깊던 나이가 많든 끝까지 듣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직 성령님의 치유하심을 믿고 맡기는 것입니다. 목장은 교회이고, 교회는 병원입니다. 소문난 병원은 환자들로 북적거리지 않습니까?